◎ '뒤란'에서 주목받고 '맨발'로 유명해진, 시인 문태준 ◎
- 2년간 연속‘가장 좋은 시인’이라 불리는 문인 -
당신의 발 아래 그곳에
바람 한 점 없어
꽃그늘에
제 몸의 그림자 속에
져내린 붉은 꽃잎들
당신의 발 아래 그곳에
두려운 그곳에
그렇게 소복하게 저물었다가 가는 것들아!
네 해 동안 꽃이랑 풀, 낯빛이 어두운 사람, 별과 여울, 미루나무를 만났다. 습지와 같은 그늘을 드리운, 낱낱이 오롯한 존재들을 만났다. 습지와 같은 그늘을 드리운, 낱낱이 오롯한 존재들을 만났다. 그들과의 대화가 이번 시집을 낳았다. 입아아입(入我我入)이다. 저것이 나한테 들어 있고, 내가 저것 속에 들어 있다. 나 아닌 것, 그러면서 동시에 나인 것들을 잘 섬기며 살아야겠다.
한 권의 시집을 묶으며 다시 읽어보니, 모시조개가 뱉어 놓은 모래알 같은 시들이다. 모래알 같은 시들이어서 손으로 쓸어 모으기만 해도 입안이 깔깔해진다.
다만, 시 쓰는 일이 오래오래(久久)해야 할 것임을 믿는다.
가을이 가까워지니 눈동자가 맑아진다.
―‘시인의 말’(문태준, 『맨발』, 2004년 8월)
재단법인 만해사상실천선양회에서 발행하는 불교계 계간 문예지 ‘유심’은 겨울호 사고(社告)를 통해 시 한편에 원고료 100만원을 지급하는 ‘격외시단(格外詩壇)’을 내년 봄호부터 신설한다고 밝힌 바가 있다. 사고에 따르면 봄․가을호, 여름․겨울호를 각각 책임지는 7명씩으로 구성된 2개 팀의 선정위원회는 번갈아가며 매호 4명의 시인과 2명의 시조시인을 선정해 격외시단 시 원고를 청탁한다. 선정대상은 1980년 이후 등단한 시인․시조시인 중 문학성이 높고 꾸준하게 활동해 온 경우다. 지금까지는 가장 비싼 시 원고료는 포항제철에서 발행하는 사보 '포스코신문'이 지급하는 편당 20만원으로 알려져 있었다. 『문학과사회』, 『창작과비평』, 『문학동네』 등 대표적인 문예지들의 시 원고료는 편당 10만원이다. 다른 문예지들은 편당 3만～5만원 정도로 그보다 낮고 일부 시전문 문예지의 경우 아예 원고료를 지급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이번 격외시단의 원고료는 대표적 문예지의 10배에 해당되는 파격적인 것이다. '격외'라는 이름부터 파격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혹 있을 수 있는 비판에도 흔들리지 말자는 뜻에서 선정위원들의 임기를 3년으로 제한한 점도 특이하다. 선정위원회는 최근 회의를 열어 봄호 격외시단에 시를 발표할 시인 6명을 확정했는데, 그 중 한 명이 문태준 시인이다.
문태준 시인은 시인․문학평론가 등 문인 12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05 오늘의 시’ 설문조사(『도서출판 작가』 시행)에서 ‘가장 좋은 시인’ 부문 1위를 차지했다. 지난해에도 마찬가지 결과였다.
뿐만 아니라, ‘가장 좋은 시’ 부문에서 <가재미>란 작품이, ‘가장 좋은 시집’ 부문에서 『맨발』이 각각 1위를 또한 차지하여 주위의 많은 시인들을 놀라게 했고, 관심과 부러움까지 한 몸에 받았다.
이와 관련, 아직 이해가 불충분할 수도 있는 독자들을 위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들을 소개코자 한다.
지난 3월 25일 저녁 서울 대학로의 한 식당에 50여 명의 문인이 모였다. 도서출판 작가에서 낸 기획 단행본 <2005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와 <…오늘의 소설>의 출간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두 권의 책은 문인들을 상대로 2004년 한 해 동안 발표되거나 출간된 시와 소설 중 가장 좋은 작품을 고르도록 설문을 돌린 결과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출판기념회에서는 시와 소설 양쪽에서 최고의 표를 얻은 문태준씨와 박민규씨에게 출판사 쪽에서 마련한 축하패가 전달되었다. 축하패는 이것이 ‘가장 객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공정하게 주어지는 상’임을 강조했다. 비록 상금은 없지만 동료 문인들의 ‘직접투표’에 의한 결정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었으리라. 출판사 쪽에서 밝힌 바로는 <…오늘의 시>의 경우 120명의 시인·평론가가 설문에 참여했으며, 소설 쪽에서는 56명의 소설가와 평론가가 설문에 응했다. 문태준씨의 시 <가재미>는 응답자 중 9명의 추천을 받았다. 문씨는 시집 <맨발>로 모두 16명의 추천을 받아 ‘가장 좋은 시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문씨는 지난해의 같은 설문에서도 시 <맨발>이 ‘가장 좋은 시’로 뽑힌 바 있다. 소설에서는 박민규씨의 단편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가 모두 15명의 추천을 받았으며, 공지영씨의 소설집 <별들의 들판>은 13표를 얻어 가장 좋은 소설집·장편에 올랐다. ‘좋은 시인’ 부문에서 5위에 오른 중진 시인 천양희씨가 축사를 하는 등 출판기념회의 분위기는 훈훈했다. 천씨는 “시든 소설이든 잘 쓰는 사람의 자리는 주인이 없다”면서 “순위에 오르지 못했다고 해서 질시와 낙담은 금물이며 서로 자극 받고 격려하는 자리였으면 한다”고 말했다. 문태준씨의 ‘수상작’이 <가재미>인 것을 감안한 식당 주인이 가자미찜을 상에 올려놓는 ‘센스’를 발휘해 더욱 흥을 돋웠다. 출판사 쪽은 “작품의 양은 늘고 있지만 갈수록 좋은 작품의 비중은 줄어드는 가운데, 독자로 하여금 좋은 작품을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을 제공한다는 데에 이 기획의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한겨레신문, 2005년 3월 26일)
측천무후가 룽먼(龍門)에 행차했다가 신하들에게 시를 짓게 했다. 동방규가 먼저 시를 읊었다. 무후는 칭찬하면서 상으로 ‘비단 도포(錦袍)’를 하사했다. 이번엔 송지문이 시를 바쳤다. 무후는 다시 감탄하더니 동방규로부터 도포를 빼앗아 송지문에게 주었다. 우리 문단에서 해마다 좋은 시와 시인의 순위를 매기는 것은 측천무후의 ‘탈포’(奪袍·도포 빼앗기)처럼 생뚱스런 구석이 있다. 시작(詩作)이 무슨 콩쿠르일 수도 없고, 득표에 따라 등수가 가려질 일도 아니다. 그래도 지난주 신문마다 실린 ‘2004년 가장 좋은 시’를 접하면서는 그런 의심이 한순간에 녹아버렸다.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시인·평론가들의 추천을 가장 많이 받았다는 문태준의 ‘가재미’는 큰어머니와 함께했던 삶의 기억들을 정감어린 언어로 떠올렸다. ‘가재미’와 그 아래 붙은 해설기사를 보며 ‘제일 좋은 시로 뽑힐 만한 것 같기도 하다’ 싶었다. 그러면서 고마웠다. 인기투표든 무엇이든 그렇게 해서 또 한 편의 좋은 시를 읽게 해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독자들이 이 시를 읽으며 가족과 친지, 삶과 죽음을 다시 한번 생각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시는 위대한 일을 해냈다.(‘시(詩)의 시대’, 오태진․조선일보 수석논설위원)
지난해 ‘가장 좋은 시’로 선정된 ‘가재미’는 지난해 현대시학 9월호에 발표된 작품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느낀 처연한 연민을 그렸다. 이 시에서 그는 임종을 앞둔 ‘그녀’를 다른 세상으로 떠나보내야 하는 고통을 그렸다. ‘그녀’에 대해선 “어머니 다음으로 좋아했던, 살붙이나 다름없는 분”이라고 말했다. 나중에 그는 큰어머니라고 밝혔다. “이 시를 쓰고 난 뒤 탈진할 정도였어요. 한 번에 써내려갔지만, 처음 시를 쓰기 시작할 때 오랫동안 망설여지고 힘들었습니다.” 한쪽 눈이 다른 쪽으로 옮겨 붙어 한쪽 밖에 볼 수 없는 가자미처럼 “그녀는 죽음만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아야만 하는” 고통 때문이었다.
‘가장 좋은 시집’으로 꼽힌 『맨발』(창비)은 지난해 조사에서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았던 같은 제목의 시를 표제작으로 삼아 묶은 것이다.
문인들이 그의 시를 좋아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문씨는 “독자들과 달리 직접 시를 쓰는 분들이 내 시를 보는 느낌이 다를 것 같다”고 조심스러워 했다. 그는 “서른다섯 살의 젊은 시인의 작품에서 묵은 맛이 나면서 끝 맛은 약간 쓴 맛이 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고 했다. 그래서 이성복 시인은 그를 두고 “어찌 보면 늙은 아이 같고 아이 늙은이 같다”고 평했을 것이다. 최근 들어 문 씨에게 시 청탁이 부쩍 늘었다. “그럴수록 스스로 단속해야죠. 시에 대해 더욱 철저해야 하고 막 써내는 일이 없도록 해야죠.”(이철희 동아일보 기자, 2005년 3월 10일)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 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 <가재미> 전문
- 제5회 미당문학상 후보 2심에 진출하다 -
문태준 시인은 1970년 경북 김천 출생이다. 문태준 시인의 고향은 추풍령에서 5리 정도 떨어진 곳으로 황악산 자락에 덮여 있다. 황악산은 김천시에서 서쪽으로 12km 정도 떨어진 곳으로서 소백산맥 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예부터 학이 많이 찾아와 황학산(1,1111m)이라 불리었으나, 직지사의 현판 및 『택리지』에 황악산으로 되어 있다. 이 산은 울창한 소나무 숲과 계곡에 옥같이 맑은 물, 가을의 단풍과 겨울의 설화가 유명하다. 그는 직지사 뒷산에 있는 황악산 높은 봉우리가 보이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에서 자랐다. 김천과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 아닌데도 차가 한시간에 한대 정도 다녔으며 전기도 늦게 들어왔다. 마을은 가난한 편으로 논농사가 많지 않앗으며, 그것도 천수답이었다.(지금은 포도농사를 주로 짓는 편이다.) 그래서 마을에 두 개 있는 저수지의 물길을 서로 차지하려는 물꼬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지금은 40여 가구에 80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는데, 오십 된 자식이 젊을 정도로 고령화된 동네라고 한다.
문태준 시인은 김천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거쳤다. 1994년에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 <處暑> 외 9편이 당선되어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수런거리는 뒤란』(창비, 2000)과 『맨발』(창비, 2004) 등 두 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등단 이후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두 권을 시집만을 낸 점과 두 권 모두 문학성을 높이 평가받는 위업을 달성하였다는 점은 이 시대의 많은 문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수런거리는 뒤란』은 첫 출간 이후 2005년 5월부로 5쇄가, 『맨발』은 2005년 4월부로 4쇄가 각각 나온 상태다.
문태준 시인은 동서문학상(제17회)을 비롯해 노작문학상(제4회), 유심작품상(제3회) 등 굵직한 상들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현재 심사가 진행중인 제5회 미당문학상 후보에 올라 있다. 미당문학상은 지난 4월부터 3개월간에 걸친 1차 심사가 끝난 상황이다. 언론 발표에 의하면 2차 심사 대상 작품이 모두 12편인데, 그 중 문태준 시인의 작품이 <맨발>, <가재미>, <노모老母> 등 세 편이나 포함되어 있다. 최종 수상자는 9월 중에 있을 예정이라고 한다. 미당문학상은 상금이 3,000만원이나 되는 아주 큰 상이다.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불교방송 PD로 재직 중이다.
- ‘맨발’의 야무짐과 위력 -
새 시집 『맨발』은 우리에게, 낡은 풍경을 낡지 않게 보여주는 독특한 방식이 여전히 문태준 시의 활력이며 그 파문의 중심임을 확인하게 한다. 또한 이 방식이 단순한 묘사의 독창성이나 수사적 취향에 기댄 것이 아니라, 훨씬 더 근원적인 체험의 깊이와 너비에서 연원함을 알 수 있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풍경의 안쪽, 그리고 그 너머를 탐사하는 일은 마르지 않는 샘으로 독자들 앞에 있다.(이희중, ‘풍경의 내력’, 『맨발』, 창비, 2004)
어찌 보면 늙은 아이 같고 아이 늙은이 같은 그의 시의 목소리는 비 온 다음날 뻘밭을 기는 지렁이의 행보를 닮은가 싶더니, 어느새 뿌연 수면을 내리찍는 물총새 부리처럼 날카롭다. 쥐를 삼킨 뱀의 몸통처럼 꾸불텅거리는 그의 시의 행갈이는 기필코, 포획한 대상을 흐물거리는 단백질 덩어리로 만들어 놓는다. 그의 시 행간마다 육식 곤충이 내뿜는 끈적한 타액이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아니다, 늙은 아이 같고 아이 늙은이 같은 장수하늘소 한 마리가 달빛 없는 밤, 세상의 갈라터진 껍질 사이로 배어나오는 수액을 느리게 음미하는 것이다.(이성복 시인)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 <맨발> 전문
앞서 설명하였지만 <맨발>은 『도서출판 작가』 시행 설문조사에서 2004년 ‘오늘의 시’ 1위에 선정된 작품이다. 문태준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맨발』의 표제시이기도 하며, 시집 『맨발』은 2005년 ‘오늘의 시집’에서 다시 1위를 차지하였다.
문태준 시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맨발>에 대한 각계의 서평을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동아일보의 기사가 우선 주목된다.
그의 두 번째 시집 『맨발』(창비)에는 들숨과 날숨, 지는 꽃과 피어나는 꽃, 고요와 격랑, 뿌리와 잎을 노래한 시 한편 한편에 느림의 철학이 담겨 있다. 시인, 평론가 117명이 지난해 문예지에 발표된 시 중에서 그의 표제작 ‘맨발’(현대시학 8월호)을 가장 좋은 작품으로 선정한 것도 이런 점을 고려한 때문일 것이다. ‘비 온 다음 뻘밭을 기어가는 지렁이 행보를 닮은’(시인 이성복의 평) 그의 시를 읽다보면 급행열차에 실려 가던 부산한 몸과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펄과 물 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맨발> 중)
시인이 지난해 여름, 재래시장 어물전에서 개조개 한 마리를 보고 착상해 썼다는 이 시는 삶의 속도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다. 또 개조개라는 하찮은 생명 하나를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 천천히 돌아온 사람’ ‘사랑을 잃고 슬픔을 견디어낸 사람’ ‘우는 것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양식을 탁발하러 나온 사람’ 등으로 빗댄 시인은 삶의 길이란, 결국 오래 걸려 느리게 홀로 가야 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삶은 원래 달고 쓰고 맵고 한 그런 맛이 전부는 아닌 것 같아요. 밍밍한 물맛 같은 거죠. 삶에서 별 큰 ‘맛’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겸손해지고, 비로소 소소한 행복들이 보인다고 생각해요.”
삶은 원래 지겹고 반복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단절이 아닌 과정, 홑이 아닌 전체이며, 직선이 아니라 둥근 원이라는 것이 시인의 얘기다. 삶에 별 큰 맛이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 ‘지금 여기’로 돌아와 만족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역설이 있다는 것이다.
사물과 사람에 예민하다 보니, 시인은 자주 눈물이 난다고 했다. 삶의 진면목을 벌써 알아버린 듯한 이 애늙은이 서른넷의 젊은 남자는 때로 모든 것들의 이력과 사연을 느끼는 일이 너무 슬퍼 밤에도 ‘꺼이꺼이’ 운 적이 많다고 한다. 그는 “시를 제대로 낳았다고 느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기도 했다.(허문명 동아일보 기자, 2004년 9월 18일)
다음과 같은 한겨레신문의 서평도 놓칠 수 없는 읽을거리다.
문씨는 첫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2000)에서 시대착오적이다 싶을 정도로 회귀적인 농촌 풍경과 정서를 천착하여 주목받았다. 이번 시집 역시 첫 시집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다만, 쇠락과 침잠의 분위기 속에서도 나름의 활기를 간직하고 있는 농촌 풍경 위에 가족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을 얹는다는 점은 이번 시집의 두드러진 면모라 할 수 있다.
쇠락해가는 농촌풍경 위에 4대에 걸친 가족사와 함께 시간에 밀려나는 슬픔 속으로 시집에 등장하는 가족은 할머니에서부터 시인 자신의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있다. 열다섯 살 때 마지막으로 보았던 조모는 ‘슬픈 그믐’(〈그믐이라 불리던 그녀〉)의 이미지로 남았다. 아버지는 넌출거리는 냄새의 똥장군을 져 날라서 호박넌출을 키우(〈배꽃 고운 길〉)거나 스무 날 남짓 동안 세 길 깊이의 우물을 팠다가는 이내 메워버리(〈우물이 있던 자리〉)면서 ‘홍역 같은 삶’(〈한 호흡〉)을 살다가는, 아들이 떠멘 상여에 실려 ‘젖을 듯 말 듯 산그림자 속으로’(〈당신이 죽어나가는 길을 내가 떠메고〉) 잠겨든다.
어머니는 어떠한가? 〈혀〉라는 작품의 둘째 연을 읽어 보자.
“내 어릴 적/눈에 검불이 들어갔을 때/찬물로 입을 헹궈/내 눈동자를/내 혼을/가장 부드러운 살로/혀로/핥아주시던” 그 어머니가 지금 아프다. 아들은 그러나 어머니의 늙은 아픔 앞에 무력하기만 하다. 그는 그래서 다만 울 따름이다: “목을 빼고 천천히/울고, 울어서/젖은 아침” “내 숨결이 꺼져가는 화톳불같이 아플 때/머위잎처럼 품어주던”(〈화령 고모〉) 고모, 그리고 “친정 왔다 돌아가는 눈물 많은 누이”(〈짧은 낮잠〉) 또는 “깻잎처럼 몸을 포개고 울던 누이”(〈그림자와 나무〉)의 누이는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푸근하면서도 아련한 슬픔을 수반한다.
마지막으로, 시인에게는 “송사리 눈 같은/아이가 둘”(〈유천(流川)〉) 있다. 이제 그 자신 아이 아버지가 된 시인은 제 손톱을 들여다보거나(〈흰 자두꽃〉), 아이의 “모시조개가 모래를 뱉어놓은 것 같은 손톱을 깎”(〈살구꽃은 어느새 푸른 살구 열매를 맺고〉)아주거나 한다.
조모에서 자식 대에 이르는 4대의 가족사를 이곳저곳 새겨 넣은 시집에서 시인은 시간의 흐름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비가 오려 할 때”(〈비가 오려 할 때〉)의 ‘~ㄹ 때’,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한 호흡〉)의 ‘사이’, “어두워지는 순간”(〈어두워지는 순간〉)의 ‘순간’, “햇솜 같았던 아이가 예처럼 손이 굵어지는 동안”(〈살구꽃은 어느새 푸른 살구 열매를 맺고〉)의 ‘동안’에서처럼 그는 유난히 시간의 경과에 촉수를 곤두세운다. 시인의 정서가 다가올 시간보다는 지나간 시간 쪽에 표나게 쏠려 있다는 사실은 시집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저녁의 시간대, 그늘과 그림자에 대한 빈발하는 언급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아련한 슬픔의 감정을 낳는다. 부모 또는 앞세대를 물결에 쓸리는 작은 섬에 비유한 아래 시를 보라.
“저녁에/ 물결의 혀를 빌려 조금씩 고운 모래톱을 바깥으로 밀어내놓은 작은 섬을 바라본다/ (…)/ 저녁에/ 조금씩 바깥으로 흘려보내는 것들을 보는 일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저녁에 섬을 보다〉)(‘해저무는 들녘에 그리움을 띄우다’, 최재봉 한겨레신문 기자, 2004년 9월 10일)
이번엔, 시집 『맨발』에 대한 이희중 문학평론가의 해설을 살펴보기로 하자.
문태준의 시를 읽으면, 흙먼지 뒤집어쓴 시골 찻길이 생각난다. 그가 나고 자란 곳과 내가 나고 자란 곳은, 같은 철도가 지나가는 비슷한 규모의 작은 도시로 서로 대략 300리를 격해 있어 아주 멀다 할 수는 없으나 강산이 다른 세월을 살았으므로 시인이 보고 기억한 풍경과 내가 기억하는 풍경이 똑같다고 고집할 수는 없다. 그러나 흙먼지 날리는 비포장 시골길 풍경이 1980년대까지 온존했던 것을 생각하면, 내가 본 60년대와 시인이 본 70년대 풍경이 많이 다르지 않았을 성 싶다. 그 길은 1.5차선 정도로 버스 두 대가 지나치기는 쉽지 않았을 너비였고, 길가 미루나무와 ‘점방’들은 사철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버스는 자갈을 튕기며 먼지를 피우며 달렸고, 그 먼지는 멀리서도 보여 차가 가는 표시가 되곤 했다. 귀가 밝은 이는 30리 밖의 버스 소리도 듣던 시절이었다.
그 또래 시인 중 비단 문태준만 이런 풍경을 보고 자랐을 리는 없는데 유독 그만 이 기억을 시의 중요한 바탕으로 삼고 있다. 큰 도시에 나와 어지간히 배웠고 같은 큰 도시에서 일터를 잡아 잘 어울려 사는 시인이 한사코 이 오랜 풍경을 되새기는 까닭과, 독자들이 그가 시에 옮긴 풍경을 놀라워하며 함께 사랑하게 되는 까닭은 또한 무엇인가.
우리는 풍경을 장만하는 문태준의 빼어난 수완을 잘 알고 있다. 등단 이후 발표한 일련의 작품들과, 네 해 전 펴낸 첫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을 통해서이다. 그는 내면의 저장고에 새겨진 농경 사회의 풍물과 경험을 직조해 독자의 눈에 익으면서도 눈에 익지 않은 풍경을 만든다. 앞의 눈은 재료를 보는 눈이고, 나중의 눈은 시를 보는 눈이다. 농촌에서 나고 자랐으나 이미 오래전 그곳을 떠났고, 현재 대도시에 일터와 집을 둔 젊은 시인이 선택한 이 ‘낡은’ 방식의 시 쓰기는 문제적인 면이 없지 않다.
문태준의 풍경에는 사람의 숨결이 있다. 그의 풍경은 사람의 모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선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에서 풍경과 사람은 분리되지 않는다. 사람의 자리를 마련해둔다는 점에서 그이 풍경은 동양화의 전통과 다르지 않다. 사람이 자연물 근처 어디에 겨우 있는 정도가 아니라 중심을 차지하는 수가 많다는 점에서 풍속화에 가깝다고 해도 좋으리라. 풍경과 그 세부인 사물에서 사람의 기척, 삶의 흔적을 찾는 특징은, 멀리서 스님을 보낸 햇차를 끓이면서 “누가 나에게 이런 간곡한 사연을 들으라는 것인가”(<햇차를 끓이다가>)라고 생각하는 대목에서 우회적으로 확인된다. 그 ‘간곡한 사연’은 말리고 비틀린 찻잎이 더운 물 속에서 풀어지는 형상에서 유추된 것이다.
한 시인의 시만으로 묶인 낱권의 시집이 다 그렇지는 않지만,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시편들을 모은 시집에는, 같은 시집에 실린 시를 읽는 길을 열어주는 시편, 말하자면 ‘열쇠 작품’이 있는 수가 있다. 물론 이 작품의 선택이나 발견도 주관에 좌우되는 것일 테지만, 어쨌거나 이 ‘열쇠 작품’을 찾으면 한권의 시집을 하나의 큰 세계로 읽을 수 있으며, 재미있게 읽는 길이 열린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나는 문태준의 두 번째 시집 『맨발』에서 그 열쇠 작품으로 <역전 이발>을 고른다.
때때로 나의 오후는 역전 이발에서 저물어 행복했다
간판이 지워져 간단히 역전 이발이라고만 남겨져 있는 곳
역이 없는데 역전 이발이라고 이발사 혼자서 우겨서 부르는 곳
그 집엘 가면 어머니가 뒤란에서 박 속을 긁어내는 풍경이 생각난다
마른 모래 같은 손으로 곱사등이 이발사가 내 머리통을 벅벅 긁어 주는 곳
벽에 걸린 춘화를 넘보다 서로 들켜선 헤헤헤 웃는 곳
역전 이발에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저녁빛이 살고 있고
말라가면서도 공중에 향기를 밀어넣는 한송이 꽃이 있다
그의 인생은 수초처럼 흐르는 물 위에 있었으나
구정물에 담근 듯 흐린 나의 물빛을 맑게 해주는 곱사등이 이발사
―<역전 이발> 전문
이 시는 과거 소읍 어디나 있었을 법한, 지금도 없지는 않을 법한 동네 이발소를 소재 공간으로 삼고 있다. 시인은 편안한 말투로 기억의 창고에서 평범한 공간의 평범한 정경을 재생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그 곳이 과거의 자신에게 행복한 느낌을 안겨준 곳임을 밝히고, 친절하게 그 가게 이름을 풀어준다. 역이 없는 동네에 자리 잡은 이발소에 ‘역전’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었던 이발사의 마음은 ‘역전’이라는 말에 대한 호감의 단순성이 다시 이 시에서 독자의 웃음을 자아내는 풍물이 되었다. (중략)
풍경을 생산하는 시인의 독특한 재주에서 더 나아가 이 시를 주목할 만한 다른 이유는 이 시에, 새 시집의 몇몇 굵직한 줄기를 가늠할 단서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세목을 들면, 첫째, 시인이 저녁 무렵을 애호한다는 점, 둘째, 인생 또는 세월에 대한 일말의 무상감을 드러낸다는 사실, 셋째, 낡거나 사라져가는 것들을 향한 시인의 시선과 추억 속의 풍경을 되새기는 이유가 드러난다는 점, 넷째 어머니의 세계로 수렴되는 상상력의 흔적 등이다. (중략)
이미 낡거나 사라져가는 것을 보는 시인의 눈길은, 주로 지난 경험을 반추하는 그의 특성에 비출 때 쉽게 눈에 띄는 만큼 중요한 것이기도 하다.(이희중, ‘풍경의 내력’, 『맨발』, 창비, 2004)
<역전 이발>은 문태준 시인의 시집 『맨발』에 있는 시이다. 이 시를 읽고 어느 독자는 다음과 느낌을 밝히고 있다. “버스 안에서 이 시를 읽던 중
내 귀에 꽂은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음악이 갑자기 시끄럽게 들렸다. 언제쯤 꼭 한번 역전이발에서 머리를 감고 싶다. 아니 역전 이발이 아니더라도 이집이 역전 이발이죠? 그렇죠? 하고 우기면서 머리를 다듬고 싶다.”(네이버 블로그 ‘고물탱크'
http://blog.naver.com/gmtank / 내가 좋아하는 시)
- ‘수런거리는 뒤란’의 정체 -
‘어머니의 세계’는 고유명사로서 어머니와, 보통명사로서 어머니를 아우른 여성들의 공간이며, 이는 문태준의 시에서 ‘뒤란’으로 상징된다. ‘뒤란’은 첫 시집의 표제에서도 보듯 지속적으로 시인의 시세계를 지탱하는 줄기가 되고 있다. 이 여성들의 세계는 가족 공동체 또는 ‘뒤란’의 세계를 직접 다루고 있지는 않으나, 다른 주제의 시에서는 시인이 비유의 매개를 선택할 때 가족적 세계의 경험적 세목을 중요하게 검토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찾아보면, “예순 갑자를 돌아나온 아버지처럼/ 그 홍역 같은 삶을 한 호흡이라고 부르자”(<한 호흡>), “꿈은 멀어져가는 낮꿈은/ 친정 왔다 돌아가는 눈물 많은 누이 같다”(<짧은 낮잠>), “어두워지는 저녁에 뜨락 위 한 켤레 신발을 바라본다/ 언젠가 누이가 해종일 뒤뜰 그늘에 말리던 고사리 같다”(<뜨락 위 한 켤레 신발>) 등의 구절에서 가족 구성원이 나타난다.
山竹 사이에 앉아 장닭이 웁니다
묵은 독에서 흘러나오는 그 소리 애처롭습니다
구들장 같은 구름들은 이 저녁 족보만큼 길고 두텁습니다
누가 바람을 빚어낼까요
서쪽에서 불어오던 바람이 산죽의 뒷머리를 긁습니다
산죽도 내 마음도 소란해졌습니다
바람이 잦으면 산죽도 사람처럼 둥글게 등이 굽어질까요
어둠이, 흔들리는 댓잎 뒤꿈치에 별을 하나 박아주었습니다
― <수런거리는 뒤란> 전문
“집들은 뒤란을 보여주기 싫어하고 사람은 낯빛을 숨기길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뒤란이 넓은 집을 보았으니 화령 고모네 집터였다”라며 시인의 삶과 기억에 각인된 한 여인의 삶을 노래한 <화령고모>, 직접적으로 여성적 세계의 깊은 유서와 속뜻을 아름답게 탐사하고 있는 <대나무숲이 있는 뒤란> 같은 작품들을 더 볼 수 있다. 후자에서 시인이, “한채 집이 할머니 귓속처럼 오래 단련되어도/ 이 집 뒤란으로는 바람도 우체부처럼 오는 것이니/ 아, 그 먼 곳서 오는 반가운 이의 소식을 기다려/ 누군가 공중에 이처럼 푸른 여울을 올려놓은 것이다”라고 노래할 때 일종의 비밀스런 폐쇄공간으로서 ‘뒤란’은 ‘대숲’이라는 ‘푸른 여울’을 통해 넓은 바깥으로 흘러나간다.
시인의 영혼에 각인된 순정한 삶의 터전이 가족 공동체라는 사실은, 그가 성장한 가계의 내력과 지역의 문화적 특성, 그리고 개인적 성향이 두루 영향을 끼친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강한 유대와 사랑으로 결속된 가족 공동체의 공간이, 시의 풍경을 구성하는 중요한 소품 또는 주역으로 채택되는 일은 자연스럽다. 살펴보면, 문태준이 살아 펄떡이는 물고기 같은 시를 건져 올리는 황금어장의 중심에 ‘뒤란’이 있다.(이희중, ‘풍경의 내력’, 『맨발』, 창비, 2004)
문태준 시인은 그의 첫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의 말미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시골집 뒤란엘 가면 심지를 잃고 모로 누운 초롱을 보는데, 그 때마다 마음이 아슬하다. 삶이라는 게 원체 모로 서 잇는 것인지는 모르되, 그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은 고통스러웠다.
장마 지나고 나서 눅눅한 것을 내어다 말리는 일을 거풍(擧風)이라 하는데, ‘바람을 들어올린다’는 그 말의 여울을 빌려 일흔 다석 편의 시를 세상에 내놓는다. 바람을 들어올려 가슴속에 남아 있던 무거리를 마저 체질할 수 있다면, 그래서 흰 광목 몇 마처럼 마음자리가 환해졌으면 좋겠다. 가늘고 가벼운 다리로 수면을 횡단하는 소금쟁이처럼. 쉴 새 없이 바람에 흔들렸던 가족 모두에게 미욱한 첫 시집을 바친다.”(문태준)
다음은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에 대한 몇몇 서평들이다.
문태준 시에는 실재와 환몽이 간격을 벌리고 그 사이로 추억이라는 아름다운 세로(細路)가 나 있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애잔한 그리움 속을 서성이고 처연한 우수에 젖게 된다. 그러나 이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이 정작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은 의고투의 추억담이 아니라 無名을 살수록 더욱 생생해지는 삶 자체의 향기일 것이다.(김명인 고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아 참 좋은 시들이다. 오랜만이다. 이, 깊은 내륙의 정서를 나는 뼜골의 시들이라고 이름 붙이면 어떨까 싶다. 마치 뜨거운 뼛속에서 구워낸 시들만 같다. 읽고 나니 내 마음의 뼈들도 뜨끈뜨끈하다. 또래의 친구들과 비교해 특이하고 아름답다. 시가 낡디낡은 언어의 품일망정 기성품을 거부하는 운명인 이상 때로 낡은 것은 많은 ‘새로움들’ 위에서 새롭기 마련이다. 문태준의 시들이 따뜻하고 아름다운 것은 그 새로운 낡음 때문이다. 옥수수 속으로 들어간 바람이 이빨을 꼭 깨물고 빠져 나온다니!(장석남 시인)
문태준 시인의 첫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은 추풍령 근처 황학산 자락, 40여 채의 시골집이 옹송거리는 늙어버린 촌 풍경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작가의 고향인 그곳은 ‘한 때 굴러다니던 저 자전거, 흙 덮어쓴 농구 곁에 멈춰’(내 마음이 흉가에) 있는 한적한 마을. 독자는 늙은 구렁이며 오리, 색 바랜 기억들이 오글거리는 작가의 뒤란을 엿보게 된다. ‘고양이 오줌을 받아 귓구멍에 부으면 귀머거리의 귀가 뚫린다’는 식의, 주술과 동네신과 금기들도 독자의 시선을 부적처럼 따라다닌다. 이른바 70년대산 시인의 시집에서 이런 토담빛의 세계를 만나다니! 라며 마음을 빼앗기고 있지만은 않을 일이다. ‘저 햇살, 천막을 펼쳐 멸치들을 후리고 있다/ 바람의 공회당, 그 후락(朽落)한 폐옥을 낮달이 걸어 들어가고 있다’(유랑극단) 라는 풍요한 시각적 이미지나, ‘장판 걷혀진 구들장으로 불기둥이/ 훅 지나간다 흔적은 얼마나 관능적인가’(빈집3) 라는 내면의 단단한 옹이를 놓쳐버릴 수 있다.(동아일보 유윤종 기자, 2000년 4월 8일)
70년생 89학번, 60년대 빈곤의 고갯마루를 넘자마자 70년대의 개발과 속도에 휩쓸려 버린 이들. 80년대의 끝머리에서 진보의 꿈을 맛보았지만 한순간에 ‘산세대’라는 90년대 실존의 기호속에 묻혀버려야 했던 세대. 그들의 삶은 회색이다. 70년생 동갑내기 두 작가가 나란히 첫 소설집과 시집을 펴냈다. 소설가 김연수씨의 소설집 <스무 살>과 시인 문태준씨의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우연처럼 고향까지 경북 김천으로 같은 두 사람은 1994년 등단한 문단 동기생이다. 문씨의 <수런거리는 뒤란>에 담긴 75편 시편들은 갓 서른의 젊은이답지 않은 ‘느림’의 서정이다. 어린시절 고향의 공간인 ‘태화리’, ‘빈집’ 시편들로 구체화된 그 서정은 그 또래의 먼 기억 속에만 겨우 남아 있는 한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경향신문 김광호 기자, 2000년 4월 6일)
제트기가 지나간 뒤의, 제트기가 남기고 간 구름을 본다. 어린 시절 제트기를 보려고 얼마나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던가. 너무나 깊은 곳에서, 너무나 빨리 사라져버리는 제트기, 제트기가 남기고 간 구름은 서서히 퍼지면서 알 수 없는 슬픔 속으로 어린 나를 데려가곤 했다. 제트기의 꼬리에서 나오는 선명한 자국이 점점 부풀어가는 모습은,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내게 심어줬다. 문태준의 첫시집 『수런거리는 뒤란』을 몇차례 되풀이 읽는 동안, 나는 어린 시절의 제트기가 다시 내 머리 위로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제트기가 지나간 뒤, 그 뒤의 구름을 쫓아 제트기가 있을 만한 하늘에 눈길을 주듯, 그 멀고 아득한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최초의 선명한 자국을 보는 듯했다. 문태준의 시들은 고은, 신경림에서 내려온 농촌시의 계보가 문득 70년대샹 디지털 세대에게까지도 전승될 수 있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준다. 비슷한 또래의 젊은 세대의 시들이 실체의 자연을 탈각시키면서 사이버스페이스(가상공간의 ‘기계화된 자연’을 조립해가는 것과는 정반대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문태준의 시를 조용히 읊조리다가 나는 이 아르마운 시구절에 눈을 준다. 그 사십여 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이 내게 “복화술로 말을 걸고 있”는 동안 나는 어느새 제트기가 날아가는 하늘에 눈을 주던 느림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우리의 삶은 거기에서 퍼진 구름이 아닌가. 어찌 거기가 별천지이겠는가. 무너지는 자세로 팔을 벌려 돌아오라고 손짓하는 빈집들이 원초적으로 아픈 그곳이…….(박형준, ‘늙은 풍경에 대한 관능, 혹은 샤머니즘의 세계’)
- 시인이라는 모자 -
어두워지는 순간에는 사람도 있고 돌도 있고 풀도 있고 흙덩이도 있고 꽃도 있어서 다 기록할 수 없네
어두워지는 것은 바람이 불고 불어와서 문에 문구멍을 내는 것보다 더 오래여서 기록할 수 없네
어두워지는 것은 하늘에 누군가 있어 버무린다는 느낌,
오래오래 전의 시간과 방금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을 버무린다는 느낌,
사람과 돌과 풀과 흙덩이와 꽃을 한사발에 넣어 부드럽게 때로 억세게 버무린다는 느낌,
어두워지는 것은 그래서 까무룩하게 잊었던 게 살아나고 구중중하던 게 빛깔을 잊어버리는 아주 황홀한 것,
오늘은 어머니가 서당골로 산미나리를 얻으러 간 사이 어두워지려 하는데
어두워지려는 때에는 개도 있고, 멧새도 있고, 아카시아 흰 꽃도 있고, 호미도 있고, 마당에 서 있는 나도 있고……. 그 모든 게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개는 늑대처럼 오래 울고, 멧새는 여울처럼 울고, 아카시아 흰 꽃은 쌀밥 덩어리처럼 매달려 있고, 호미는 밭에서 돌아와 감나무 가지에 걸려 있고, 마당에 선 나는 죽은 갈치처럼 어디에라도 영원히 눕고 싶고……. 그 모든 게 달려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개는 다른 개의 배에서 머무르다 태어나서 성장하다 지금은 새끼를 밴 개이고, 멧새는 좁쌀처럼 울다가 조약돌처럼 울다가 지금은 여울처럼 우는 멧새이고, 아카시아 흰 꽃은 여러 날 찬밥을 푹 쪄서 흰 천에 쏟아 놓은 아카시아 흰 꽃이고……. 그 모든 게 이력이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오늘은 어머니가 서당골로 산미나리를 베러 간 사이 어두워지려 하는데
이상하지, 오늘은 어머니가 이것들을 다 버무려서
서당골에서 내려오면서 개도 멧새도 아카시아 흰 꽃도 호미도 마당에 선 나도 한사발에 넣고 다 버무려서, 그 모든 시간들도 한꺼번에 다 버무려서
어머니가 옆구리에 산미나리를 쪄 안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세상이 다 어두워졌네
―<어두워지는 순간> 전문
그녀가 손등으로 눈을 꾹 눌러 닦아 울려고 할 때
바람의 살들이 청보리밭을 술렁이게 할 때
소심한 공증인처럼 굴던 까만 염소가 멀리서 이끌여 돌아올 때
절름발이 학수형님이 비료를 지고 열무밭으로 나갈 때
먼저 온 빗방울들이 개울물 위에 둥근 우산을 펼 때
―<비가 오려 할 때> 전문
<어두워지는 순간>과 <비가 오려 할 때> 두 시는 제4회 『노작문학상』 수상작이다. 다음은 노작문학상 당선시집에 실린 문태준 시인의 당선소감이다.
“산길을 거닐다 산 밑 막걸리집에 들러 시름을 내려놓는 재미가 생겼습니다. 작고 볼품없는 집이지만 여주인의 ‘농익은’ 사투리가 푹 삭힌 김치처럼 맛있는 집입니다. 수상 소식을 듣고 혼자 찾아간 그날에는 그 집 문이 잠겨 있어 들를 수가 없었습니다. 주인은 없었습니다. 숟가락으로 문을 걸어 잠가 놓았습니다. 부재를 증명하는 게 이렇게 간단합니다. 숟가락 모가지를 구부려 척 걸어놓으면 끝입니다. 시가 이런 것쯤 된다고 생각합니다. 부재를 증명하는 게 시입니다. 언어의 모가지를 탁 꺽어 문에 척 걸쳐 놓으면 끝입니다. 그러나 이게 쉬운 게 아닙니다. 문에 숟가락을 척 걸어 부재를 증명하는 것은 몸이 익힌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몸이 실리지 않으면 어찌 이런 언어나 나오겠습니까. 50년 전 한 선배 시인은 시인을 낡은 모자쯤에 비유했습니다. 비 오는 날 거리를 헤맬 때 낡은 모자는 온몸을 가리기에는 너무나 어줍잖은 것이지만, 사람이 평생 마른 옷만을 입을 수는 없으니 그나마 머리카락이 젖지 않게 하는 이런 모자야말로 얼마나 고맙고 눈물겨운 것이냐고 말했습니다. 시인이라는 것을 거창하게 말하지 않는 겸손하고도 맑은 정신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저는 달리 잘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시인이라는 모자를 평생 쓰고 다니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우산 하나 장만할 수 없으나 비오는 날 거리를 헤맬 때 시인이라는 모자 덕에 머리카락이 젖지 않는 것만으로도 눈물겹게 고마운 일로 생각하며 살다 행복하게 사라지겠습니다.”(문태준)
문태준 시인은 이제 분명 우리시대 시문학의 ‘샛별’이요 ‘거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하다. 1994년 등단 이후 10여년이 넘는 세월동안 그가 세상에 낸 시집은 딱 두 권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의 시 한 편 한 편에 대한 가치와 무게란 짐작키 어려울 정도이다. 그의 시를 대하면 시의 진수를 보는 듯 하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필자는 시작의 정도를 걷는 우리시대의 진정한 시인의 모습을 엿보게 된다.
* 월간 <시사문단> 2005.8월 헤드스토리
왜 서사시를 쓰는가 - 안도섭 시인에게 묻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