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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火刑日》에 나타난 우당의 저항시 세계 * / 안재동
Ⅰ. 들어가면서
우당牛堂 안도섭安道燮 시인을 평소 잘 아는 문인들은 흔히 그를 ‘서정을 바탕으로 역사와 시대에 항거한 문인’, ‘한용운, 김영랑, 이육사, 김광섭, 신석정, 윤동주 등과 같은 민족시인’, ‘자연의 생명력과 삶의 진실을 노래하는 서정시인’ 등으로 일컫기도 한다. 특히 ‘역사와 시대에 항거한’, 즉 저항시인으로서 차지해야할 그의 문학적 위상과 비중이 매우 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그것이 덜 알려지고 있는 실정이다.
안도섭 시인의 대하서사시 <黃土峴의 횃불>이 1979년에 ‘농민문화農民文化’지에 연재된 뒤 1980년에 단행본으로 간행되었으나 신군부에 의해 5,000부가 몰수당하기도 했다.
안도섭 시인은 대하서사시집 ≪새야 녹두새야≫(《黃土峴의 횃불》을 개명하여 재출간)와 5ㆍ18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저항시집 ≪어느 火刑日≫을 비롯하여 소설집 ≪방황의 끝≫ 등 여러 저항 관련 저서들을 세상에 냈다. 그러나, 그러한 많은 저서들을 한꺼번에 단일한 주제로 다루기엔 너무 피상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수 있고, 그 분량도 방대해질 것이므로, 여기서는 안도섭 시인의 저항시집 ≪어느 火刑日≫ 한 가지만 분석해 보고자 한다.
그러나 이도 역시, 필자가 이번 경우처럼 단번에 그의 문학적ㆍ대중적ㆍ역사적 가치 등을 구체적으로 밝혀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즉, 필자의 왜소한 능력이나 식견 탓으로 안도섭 시인의 시세계가 제대로 분석․조명되지 못하고 그의 작품이 피상적으로 소개되는 정도의 수준에 머무를 수도 있을 것이란 뜻이다.
따라서 향후 많은 석ㆍ박사 과정의 문학전공 학생들과 문학평론가들이 안도섭 시인의 저항시 세계 혹은 그의 저항문학 전반을 놓고 다양한 각도로 조명하거나 연구해 볼 만한 가치가 클 것이란 점을 말해두고자 한다.
Ⅱ. 5ㆍ18민주화운동과 저항문학
1. 역사와 문학 그리고 5ㆍ18
광주항쟁을 생각하면 새삼 역사의 흐름을 실감하게 된다. 바라는 일은 한없이 더디게 이루어지고 그날의 유혈과 절규는 너무도 쉽게 잊혀진다는 점에서 특히 역사의 냉엄한 흐름을 절감하게 된다.
광주항쟁 당시 시민들이 열망했던 다른 지역의 호응 혹은 봉기는 1987년 6월을 기다려야 했다. 하루하루 피를 말리며 ‘긴급구조’ 혹은 ‘바람의 궐기’(임동확, ｢긴급송신｣)를 기다렸는데 배가 좌초되고 7년이 지나서야 구조대가 나타나다니! 그 후 간난신고 우여곡절 끝에 1997년에는 5ㆍ18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고 망월동에 묘역이 조성되었다.
숙원사업이었으되 자칫 허울 좋은 일이기 쉬운 기념일 지정과 ‘묘역 정비’가 이루어지고 이제 광주항쟁은 먼 과거의 일로 급속히 잊혀져가고 있다.(최두석, ‘광주항쟁과 시’)
진정한 문학은 역사를 넘어서서 존재할 수 없다. 다만 굳어버린 역사를 넘어서기 위해서 몸부림칠 뿐이다. 그래서 문학 중에서도 가장 최전선, 즉 아방가르드의 위치를 잃어본 적이 없는 시마저도 역사의 뒤편에 선다.(이황직, ‘5월 민중항쟁의 형상화 — 5ㆍ18 시의 문학사적 위상’)
이황직의 말대로 역시 문학은 역사를 넘어서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에 크게 공감한다. 역사의 현장을 떠난 문학은 어쩌면 문학으로서의 가치가 그만큼 희박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살펴보면 5ㆍ18이 몸부림칠 당시에도 우리의 문학이 저 먼 곳으로 떠나 있었거나 침묵만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문학도 분명 민중과 함께 있을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지난 2005년 4월 23일부터 시작된 문화방송(MBC) 특별기획 드라마 ｢제5공화국｣(매주 토․일 방송)에서도 1980년 당시의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발생한 5ㆍ18민주화운동을 25년여 만에 리얼하게 재현해 방송하고 있다. 광주항쟁이 발발한 지 벌써 오랜 세월이 흘렀고 내용적으로도 이미 잘 알려진 역사적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세인들의 관심과 화제가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은 역사의 한순간 한순간은 절대 인위적으로 지워질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5ㆍ18민주화운동의 의미는 대한민국도 국민들의 피로 민주주의를 얻었다는 것이고, 지금의 프랑스 국민들이 공화국에 대단한 애착을 보이고 있는데 그것은 그네 선조들이 프랑스시민혁명이라는 시민들의 ‘생명과 피’로써 지금의 민주주의와 공화정을 얻었다는 강한 자부심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의 독립전쟁과 영국의 명예혁명도 그와 유사하다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의 이해를 가진다면, 5ㆍ18은 서슬 퍼렇던 신군부 군사정권에 대해 국민 스스로의 손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한, 그야말로 위대한 역사적 대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다른 여느 선진 민주국가의 국민들 못지않게 민족적 긍지를 느껴도 좋을 것이다. 외국에서도 5ㆍ18민주화운동이 프랑스시민혁명과 함께 근대사회 및 현대사회의 주요한 시민혁명의 하나로 연구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올 정도니까.
2. 5ㆍ18 저항시문학
이황직의 글(이황직, ‘5월 민중항쟁의 형상화 — 5ㆍ18 시의 문학사적 위상’)을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광주민중항쟁을 직ㆍ간접으로 다룬 작품집들이 많이 파악되고 있는데 그 중 시선집 ≪누가 그대 큰 이름 지우랴≫(인동, 1987)는 1987년 6월항쟁의 승리 직후 묶여졌다. 문병란과 이영진이 엮은 이 책에는 최초의 광주시인 김준태의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비롯한 200여 편의 시가 총 5부로 나뉘어, 각각 <5월의 정치사적 의미>, <항쟁 참상의 묘사>, <5월 영령 추모시>, <5월 정신을 계승한 넋들을 추모한 시>, <5월 이후의 젊은 시인들의 인식> 등 주제별로 수록하였다.
광주민중항쟁 10주년을 맞아 출간된 다른 두 권의 시집이 더 있는데, 항쟁 당시의 상황에 근접하기 위해 항쟁 기간 중에 불리던 노래와 작가가 알려지지 않은 시까지를 포함시킨, ≪마침내 오고야 말 우리들의 세상≫(김남주ㆍ김준태 엮음, 한마당, 1990)과 시선집인 ≪하늘이여 땅이여 아아, 광주여≫(황토, 1990)가 그것이다.
≪마침내 오고야 말 우리들의 세상≫에는 노래로 더 잘 알려진 백기완의 <임을 위한 행진곡>, 공동 창작된 <광주 출전가>, 그리고 항쟁 때 ‘노가바’(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된 <늙은 투사의 노래> 등이 따로 편집되어 실려 있어, 당시의 상황을 더욱 가깝게 보여준다. 또한 이 시집에는 「오월시」 가운데에도 대표적으로 예술적 성취가 뛰어난 작품들이 정성껏 모아졌다.
≪하늘이여 땅이여 아아, 광주여≫는 어느 시 못지않은 감동을 주는 망월동의 묘비명을 함께 실어 살아있는 감동을 느끼게 하고 있다.
이상의 시집들은 비록 연대기를 고려하지 않고, 시인 개개인의 특성을 최대한 낮추고 대신 광주 민중의 투쟁과 비극을 보이는 데 집중하는 약점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하지만 이 시집의 목록만으로도 연구자들은 무척 버거운 느낌을 갖게 된다. 편집자들의 노력으로 주제별로 접근하는 데에는 용이하다는 점에 수긍하면서도. 한편으로 수백 편의 시가 어쩌면 편집자들이 나눈 그물에 걸리고 말 정도로 허술하게 읽힐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그 밖에도 어느 누구보다 광주민중항쟁의 문학적 형상화에 힘써온 김준태 시인은 자신의 「오월시」만으로 한 권의 시집을 엮었다. ≪아아 광주여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실천문학사, 1988)는 최초의 「오월시」로 알려진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비롯한 그의 대표작 40여 편과 「5월문학」에 관한 유명한 연설인 <5월과 문학>을 담고 있다.
연작보다는 하나의 장시로 읽히는 박몽구의 ≪십자가의 꿈≫(풀빛, 1986) 역시 끈질기게 광주의 문제에만 집착한 시인의 명예로운 산물이다. 다만 지나치게 산문적인 것이 흠으로 지적된다.
항쟁 10주년을 맞이하여 몇몇 시인이 5ㆍ18 관련 시만을 모아 따로 개인 시집을 낼 기회를 가졌다. 이 선집들은 해당 시인들의 문학적 공과를 살피는 데 유용할 뿐만 아니라 광주민중항쟁 10주년을 맞이하여 기존의 창작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기준점의 역할을 하였다. 그 동안 마당굿의 형태로 4ㆍ19와 5ㆍ18을 승화시켜온 고故 고정희는 타계 직전 50여 편의 「오월시」를 모아 ≪광주의 눈물비≫(동아, 1990)를 펴냈다. 옥중시 만으로도 두툼한 두 권의 시집을 펴내 광주의 비극이 어떻게 형상화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질문해왔던 고故 김남주 시인 역시 40여 편의 작품을 모은 5ㆍ18 기념시집 ≪학살≫(한마당, 1990)을 펴냈다.(이황직, ‘5월 민중항쟁의 형상화 — 5ㆍ18 시의 문학사적 위상’ 요약)
광주항쟁 관련 저항 작품으로는 시 외에도 소설이나 연극, 미술, 노래 등 다양한 장르에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지만 여기서는 시에 국한하여 논의키로 한다.
그동안 광주항쟁 관련 시편들은 두 권의 시선집, ≪누가 그대 큰 이름 지우랴≫(인동, 1987)와 ≪하늘이여 땅이여, 아아 광주여≫(황토, 1990)에 대체로 모여 있다. 한편, 두 권의 시선집에 일부 수록되어 있긴 하지만, 박몽구의 ≪십자가의 꿈≫과 임동확의 ≪매장시편≫은 광주항쟁을 집중적으로 다룬 연작시라는 점에서, 김희수의 ≪오늘은 꽃잎으로 누울지라도≫는 광주항쟁을 다룬 서사시라는 점에서 따로 주목할 만한 시집이다.(최두석, ‘광주항쟁과 시’)
광주항쟁 관련 시를 많이 쓴 시인으로는 김남주, 김준태, 김진경, 문병란, 박몽구, 황지우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총구가 나의 머리숲을 헤치는 순간
나의 양심은 혀가 되었다
허공에서 헐떡거렸다 똥개가 되라면
기꺼이 똥개가 되어 당신의
똥구멍이라도 싹싹 핥아 주겠노라
혓바닥을 내밀었다
나의 싸움은 허리가 되었다 당신의
배꼽에서 구부러졌다 노예가 되라면
기꺼이 노예가 되겠노라 당신의
발밑에서 무릎을 꿇었다 나의
양심 나의 싸움은 미궁迷宮이 되어
심연으로 떨어졌다 삽살개가 되라면
기꺼이 삽살개가 되어 당신의
손이 되어 발가락이 되어 혀가 되어
삽살개 삼천만 마리의 충성으로
쓰다듬어 주고 비벼 주고 핥아 주겠노라
더 이상 나의 육신을 학대 말라고
하찮은 것이지만 육신은 나의
유일唯一의 확실성確實性이라고 나는
혓바닥을 내밀었다 나는
손발을 비볐다 나는
— 김남주, <진혼가> 부분
무등산도 버리고 영산강도 버리고
버림받은 전라도 땅 위에
버림받은 우리네 설움만 두고
장성 갈재 후딱 넘어
그대 밤봇짐 싸버린 새벽만 남았어요.
살강에 먹다 남은 보리밥만 남았어요.
불타는 요내 가슴만 두고
활활 타오르는 진달래만 두고
나슬나슬 뽕잎 피는 아름다운 4월
장광에 고이는
눈부신 햇살만 두고
그대 서울로 가신 님아
살미친 푸름 속에 지글지글 타는 육신만 남았어요
빼앗긴 입술, 버림받은 빈 손가락만 남았어요.
논바닥도 타오르고 강바닥도 타오르고
우리네 가슴, 우리네 눈물도 타오르고
한많은 전라도가 몽땅 타고 있어요.
흉작의 들판이 타고
황톳빛 전라도가 몽땅 타고 있어요.
— 문병란, <나를 버리고 가신 님> 부분
물론, 위에 언급한 시인들 외에도 광주민중항쟁을 주제로 시를 발표한 시인들이 적지 않다.
안도섭 시인도 그들 중 한 명에 해당되는데, 살펴보면 몇몇 특이한 점들을 관찰할 수 있다. 그는 광주항쟁과 관련된 주제로 72편씩이나 되는 자작 시편들을 모아 단행본 시집으로 출간했다. ≪어느 火刑日≫(靑史, 1987)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 우리가 광주항쟁이 관련된 저항문학 이야기를 논할 때는 ≪어느 火刑日≫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실수로라도 간과한다면, 우리 문학사와 문학사료 정리에 큰 잘못과 우愚를 범하게 될 것이다.
지금 막 화형火刑잔치 끝난 자리
최루탄의 안개꽃 피고
한얼 가른 지신地神,
잡귀 화염에 싸여
재 되어 가는 불티 하나
날라리춤도 어우러지리
한마당 푸념굿,
땡땡구리 잡고 얼씨구절씨구나
해토解土 머리
스크럼 달렸다 다시 밀리는
저 거센 흐름,
—선회하는 마당 놀음
어느 과녁
꿰뚫음인가
아폴로의 장한 화살이기
어둠 사르는 불꽃
아픈 발부리마다 나뒹구는 차돌멩이들
— 안도섭, <어느 火刑日> 전문
Ⅲ. 안도섭의 저항시 세계
1. 안도섭의 저항정신과 ≪어느 火刑日≫
도서출판 청사靑史에서 발행된 ≪어느 火刑日≫은 인쇄일이 1987년 9월 20일, 출간일이 1987년 9월 30일로 각각 되어 있다.
안도섭 시인이 공식적으로 등단한 해는 1958년이다. 안도섭 시인은 그 해 조선일보 신춘문예와 평화신문 신춘문예에 동반 당선된, 탁월한 문학성을 지닌 문인이다. 그런 그가 ≪어느 火刑日≫을 출간할 당시까지 거의 19년 가까이나 게으름 피지 않고(그가 세상에 낸 저서 등을 참고컨대), 중단 없이 창작활동을 지속해 왔다는 점을 우리는 먼저 인지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그 시점에 서서 그를 바라보게 되면(이를테면 시작詩作 경륜) 그의 시작詩作 기교나 능력은 거의 달관의 경지에까지 이르렀을 것임이 쉽게 짐작된다. 다시 말하면, 그런 그의 시작詩作 수준을 먼저 이해하고 나서라야만 ≪어느 火刑日≫에 대한 논의가 더 피부에 와 닿고 의미가 있을 것이란 취지이며, 그의 시 한 편 한 편이 결코 가볍게 보아 넘길 작품이 아니란 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또한, ≪어느 火刑日≫에 담긴 시들이 모두 1980년 광주민중항쟁 당시에 쓰여진 작품들로서, 그 때는 그가 등단 즉 공식적으로 시작詩作 활동을 시작한 지 12년차 되는 시점이다. 그 시점을 기준으로 안도섭 시인을 평가하더라도 그의 시편들에 담긴 시작詩作 기교와 수준, 그리고 작품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짐작될 것이다.
여느 시인이 입모아
노래해도
나는 저주하련다
광주여
내 희망 앗은
회진의 도시여
광주여
그날
무등의 횃불 드높이
하늘 찌르던 날
나는 얼마나 소리소리
울었던가
환호했던가
허나 불화살
너를 꼬느었으니
일곱 무지개는 어디
피었는가
한 잔 술에 거나해지면
더운 손 마주잡고
웃음짓던 벗이여
이 밤이 지새면
아침을 합창하는
불꽃 신화神話
무등의 해돋이 빛날 때
나는 달려가
또다시 노래하련다
광주여
— 안도섭, <광주에 부치는 노래> 전문
위 시의 1연 ‘여느 시인이 입모아/ 노래해도/ 나는 저주하련다/ 광주여’에서 나타난 ‘저주하련다’와 2연 ‘내 희망 앗은/ 회진의 도시여/ 광주여’에서 표현된 ‘내 희망 앗은’이란 대목은 당시의 광주 현지의 상황에 시인이 거의 이성을 잃을 정도로 분노가 일고 절망에 빠졌음을 엿보게 한다.
그리하여 3연의 ‘그날/ 무등의 횃불 드높이/ 하늘 찌르던 날/ 나는 얼마나 소리소리/ 울었던가/ 환호했던가’에서 ‘울었던가’와 ‘환호했던가’라는 구절을 반복적으로 표현함으로써 군인들의 군화에 짓밟힌 광주와 민주주의를 되살리기 위해 봉기한 민중에 대한 기쁨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케 한다.
마지막 연의 ‘무등의 해돋이 빛날 때/ 나는 달려가/ 또다시 노래하련다/ 광주여’에서는 광주를 사랑하는 시인의 심정과 의지가 극나라하게 나타난다.
봉선화 꽃망울이 채 맺기 전
어린 소녀의 가슴에
장밋빛 꽃잎이 뿌려졌다
그 생피 쏟는 구슬……
누가 누구 향한 칼끝이냐
어느 카인이 휘두른
사탄의 거리—날름한 칼날이냐
온 남녘 벌 흐느끼던
그날의 매디진 가슴,
소리소리 달려 나선 항쟁의 예니레
꽃다운 이름으로
우지끈 일어섰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노래여, 불새여
도시의 무덤에는
그래도 피는 칸나꽃 전설,
해마다 5월이 오면
해마다 5월이 오면
— 안도섭, <항쟁의 노래> 전문
<항쟁의 노래>에서는 광주진압군에 대한 시인의 비판정신이 각 연에서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다.
‘봉선화 꽃망울이 채 맺기 전/ 어린 소녀의 가슴에/ 장밋빛 꽃잎이 뿌려졌다’는 표현의 1연과 ‘그 생피 쏟는 구슬……’이란 2연, 그리고 ‘누가 누구 향한 칼끝이냐/ 어느 카인이 휘두른/ 사탄의 거리-날름한 칼날이냐’라고 말하고 있는 3연 등을 중심으로 시 전체의 분위기가 마치 김춘수 시인이 1959년에 발표했던 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을 연상케 한다. 즉, 소련의 폭정에 항거하여 일어선 헝가리 의거(1958년)를 진압하기 위하여 출동한 소련군의 탄환에 무참하게 쓰러진 어느 소녀의 모습을 그린 작품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에서와 마찬가지로 <항쟁의 노래>에서도 처절함과 분노, 그로 인한 저항의 외침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바로 한국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즉 ‘광주에서의 소녀의 죽음’이라고나 할까.
다뉴브강江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東歐의 첫겨울 가로수街路樹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黃昏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발數發의 쏘련제製 탄환彈丸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순간瞬間,
바숴진 네 두부頭部는 소스라쳐 삼십보三十步 상공上空으로 튀었다.
두부頭部를 잃은 목통에서는 피가
네 낯익은 거리의 포도鋪道를 적시며 흘렀다.
너는 열세 살이라고 그랬다.
네 죽음에서는 한 송이 꽃도
흰 깃의 한 마리 비둘기도 날지 않았다.
네 죽음을 보듬고 부다페스트의 밤은 목놓아 울 수도 없었다.
죽어서 한결 가비여운 네 영혼靈魂은
감시監視의 일만一萬의 눈초리도 미칠 수 없는
다뉴브강江 푸른 물결 위에 와서
오히려 죽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소리 높이 울었다.
— 김춘수, <부다페스트의 소녀의 죽음> 일부
김춘수 시인의 <부다페스트의 소녀의 죽음>은 헝가리, 즉 외국의 문제상황과 국민정서를 시인의 감정에 이입시켜 시로 묘사되었지만, 안도섭의 <항쟁의 노래>는 바로 우리 조국에서 실제로 발생한 문제상황과 시인 자신이 바로 당사자인 그대로의 정서와 감정이 시에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 큰 차이점일 것이다. 안도섭 시인의 시를 몇 편 더 살펴보자.
검은 총뿌리 앞에서 였다
모-다 사람들의 가슴엔 한결같이
옳은 念願 그것과
참된 사랑 그것과
더운 眞理마저 간직한 채
기막힌 憤怒가 차 오르고 있었다.
水仙花가 멍울져 곱게 피어나던 四月
그날의 마산에서 서울에서 부산에서
대구에서 인천에서 광주에서 드디어
환호성을 올리며 밝히던 횃불
어둔밤 太陽을 우러러
밝음을 찾아 밤새워 밝히던 횃불
— 안도섭, <누가 막을수 있었으랴> 부분
<누가 막을 수 있었으랴>는 1960년 ‘4ㆍ19혁명’이 발생했을 당시 신동엽 시인이 펴낸 시집 ≪학생혁명시집≫(신동엽, 교육평론사, 1960)에 수록된 시다. 안도섭 시인은 1958년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불모지>가 당선되어 등단하였고, 신동엽 시인은 1959년에 역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서 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당선되어 등단한 인연으로 두 시인은 각별한 사이로 지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시 <누가 막을 수 있었으랴>와 시집 ≪학생혁명시집≫은 ‘4ㆍ19혁명’ 대열에 서서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을 노래한 시편으로 신동엽과 뜻을 같이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자료이다.
이 같은 사실은 안도섭 시인이 5ㆍ18은 물론 4ㆍ19와도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쉽게 짐작케 한다. 다시 말하면, 부당한 권력에 대한 그의 저항정신은 하루 이틀 잠시잠깐 나타난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국가의 큰 사건이 있을 때마다 민중의 편에 서서 꾸준히 시로 형상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젠 이리 새겨둘 수밖에—
가시 돋친 장미 여의고
온 누리 흰 비둘기 타죽었노라고
나와
나의 소년은
그 꽃송이 피던 날
어디 달려갔느냐
햇살 아래
한마음 떨쳐나선 꽃밭 행렬
파도 넘실대던
가슴 가슴이기
속심지 타는 불꽃
나와
나의 소녀는
그 꽃봉올 지던 날
어디 달려갔느냐
텅 빈 하늘
넋 잃은 사람들은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안은 채
거친 시대로 내닫는
누군가 사무치듯 절명絶命한 밤에
— 안도섭,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전문
2. ≪어느 火刑日≫의 문학사적 가치
지금까지 발간된 광주민중항쟁을 직간접으로 다룬 작품집들이 상당수 있지만, 1980년대에 출간된 것은 그리 많지 않고 다음과 같은 것들이 발견되고 있다.(조사과정상 누락된 자료도 있을 수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연대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한마당, 1981), ≪우리가 우리에게 묻는다≫(나남, 1982), ≪초혼제≫(창작과 비평사, 1983), ≪이 시대의 아벨≫(문학과 지성사, 1983), ≪국밥과 희망≫(풀빛, 1984),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실천문학사, 1984), ≪5월시 동인지 제5집 : 5월≫(청사, 1985), ≪십자가의 꿈≫(풀빛, 1986), ≪시여 날아가라≫(실천문학사, 1986), ≪불이냐 꽃이냐≫(청사, 1986), ≪광화문을 지나며≫(풀빛, 1986), ≪아, 그날의 꽃잎처럼≫(사사연, 1986), ≪무등산≫(청사, 1986), ≪어느 화형일≫(청사, 1987), ≪누가 그대 큰 이름 지우랴≫(인동, 1987), ≪해청≫(창작과 비평사, 1987), ≪우리 시대의 예수≫(실천문학, 1987), ≪아아 광주여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실천문학사, 1988), ≪그날의 대행진≫(전예원, 1988), ≪끝내 물러서지 않고≫(전예원, 1988), ≪칼과 흙≫(문학과 지성사, 1989), ≪오월에서 통일로≫(빛고을, 1989), ≪민중시 5≫(청사, 1989), ≪마침내 오고야 말 우리들의 세상≫(한마당, 1990), ≪하늘이여 땅이여 아아, 광주여≫(황토, 1990), ≪광주의 눈물비≫(동아, 1990), ≪학살≫(한마당, 1990), ≪광주의 눈물비≫(동아, 1990), ≪아직은 우리 맨살로 부대낄지라도≫(눈, 1990), ≪새벽강이 뜨는 별들의 눈으로≫(눈, 1990), ≪철쭉꽃 연붉은 사랑≫(실천문학사, 1990), ≪견우와 직녀≫(한길사, 1991), ≪봄 금남로 가로수≫(살림터, 1992), ≪꽃이 이제 지상과 하늘을≫(창작과 비평사, 1994), ≪5월시 신작시집≫(푸른나무, 1994), ≪불멸의 연대≫(일월서각, 1994), ≪5월시 신작시집≫(푸른나무, 1994), ≪숲은 어린 짐승들을 기른다≫(창작과 비평사, 1995),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창작과 비평사, 1995)
이상의 작품집들 중 대부분은 여러 작가들의 시가 모여 단행본으로 간행됐거나, 작품집 중 일부만이 저항시 또는 민중시에 해당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火刑日≫은 안도섭 시인의 개인 작품만으로 엮어진 단행본이라는 데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또한, 위에서 유심히 살펴보면 1986년 이전에 발표된 시집은 그리 많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한 작가의 개인 시집은 더욱 그러하다.
그 이유에 해당될 수도 있다고 보여지지만, 안도섭 시인이 ≪어느 火刑日≫의 머리말에서 스스로 심정을 털어놓은 대목이 인상 깊다.
“한 가지 숨은 이야기가 있다면, 나는 여기 수록된 시편들을 써놓은 지 10여 년 동안 꽁꽁 묶어서 깊이 간수해 오는 동안 어느 때엔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불살라 버릴까 하는 아슬한 순간도 겪었음을 솔직히 밝혀 두는 바이다.”
펜, 즉 문학의 힘도 결코 위약하진 않지만 물리적으론 늘 총칼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속성인 것이다. 문학의 힘이란 총칼에 맞선 혹은 짓눌린 세력들에 정신적 힘이 되거나 지주가 되긴 하지만, 경우에 따라선 그도 아무런 소용없게 되기도 한다. 아무튼 5ㆍ18민주화운동 당시의 상황에선 어느 문인인들 감히 총칼 앞에 홀로 대적할 수 있었겠는가.
여기서 고 은 시인이 쓴 ‘광주 5월 민중항쟁 이후의 문학’이란 제하의 글을 잠시 살펴보고 넘어가기로 한다.
항쟁 이후 몇 년 동안 이 땅은 공포분위기에서 도무지 깨어날 줄 모르는 그런 형편이었다. 암담하다는 말이 문학적인 수식어로도 얼마나 모자랄 지경인지 모를 만큼 사회는 얼어붙었다. 이런 상황에서 1970년대 이래 어렵사리 이룩해온 민족문학 세력도 일단 그 세력 자체가 좌절되기 십상이었다. 문인주소록에서도 그들의 이름 일부가 빠져 버렸으며 그들의 임의단체와 계간지 등 문예활동의 매체가 일거에 폐간되었다. 그것도 또 하나의 학살이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 1980년 5월 이후부터 적어도 1982년 무렵까지는 그것을 죽음이라고 불러도 하나도 과장이 아니었다. 어떤 판단규칙도 허용될 수 없는 총검의 세례만으로 그 3년간은 채워졌다.(고 은, ‘광주 5월 민중항쟁 이후의 문학’에서)
안도섭 시인은 ≪어느 火刑日≫을 출간할 시점으로부터 이미 10여 년 전 <황토현黃土峴의 횃불>이라는 동학혁명에 관한 대하서사시를 써서 1978년 11월부터 ‘농민문화’에 1년 2개월 동안 연재하고, 1980년 4월 20일자로 240여 페이지에 이르는 단행본 장편서사시집 ≪황토현黃土峴의 횃불≫을 세상에 낸 바 있다. 하지만 그 시집은 곧 신군부에 의해 판금조치를 받고 시중에 유통이 불가능하게 되고 말았다.
안도섭 시인의 문학적 방법은 모더니즘 계열이다. 이 점이 미래를 향한 전망의 부재를 빚어 시를 어둡게 하고 또한 형상의 구체화에 장애를 주어 시를 어렵게 한다.
굳이 지적하자면 항쟁의 주체였던 민중들의 정치적 생명력을 담아내는 데 약간의 아쉬움이 없을 수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어느 火刑日≫에 담긴 시들은 소중한 것이다. 광주항쟁을 멀리 동학혁명으로부터 출발하여, 3월 하늘(3ㆍ1절), 4월 하늘(4ㆍ19혁명), 5월 하늘(5ㆍ18민주화운동)로 이어져 오는 치열한 역사발전의 과정으로 보고 있다는 점, 그것이 압축된 짧은 순간들을 매개로 능숙하게 포착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전편이 단일한 주제로 집약되고 있다는 점 등이 그의 긴 문학적 연륜과 어우러져 빛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원로시인 김규동은 “안도섭 시인의 시는 체험과 상념의 육화된 시이다”라면서 안도섭 시인의 시의 특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안도섭 문학이 전통을 바탕으로 의외로 고집스런 형태미와 동양적 정서를 소화ㆍ발전시켰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전통을 바탕으로 했다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선배 시인들이 이룩한 틀을 깊이 존중하며 그것을 기초로 삼는 데 있어 인색함이 없다는 것이다. 가령 이육사나 이상화 같은 리듬이라든가 철학성을 그대로 인계하고 있다는 것은 시에 있어서의 인격이나 체격은 결코 도외시 하지 않는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런가 하면, 신진 평론가 김희수는 “시의 근간은 신석정의 시에서처럼 민족적 역사의식과 저항성이 된다”라며, 그 시적 방법에 대해 “안도섭은 자칫 시적 형상화가 어려운 현실참여적 시를 미래지향적 역사의식과 서정성을 통해 극단과 도그마에서 탈피하고 있다. 그만의 탁월한 마니에르(maniere) 기법이 아닌가 싶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Ⅳ. ≪어느 火刑日≫ 시편 탐구
1. ≪어느 火刑日≫ 수록시편 개황
≪어느 火刑日≫에는 모두 72편의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으며,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제1부/ 이 하늘 아래 살면
<광주에 부치는 노래>, <이른 봄>, <눈들은 파수병이 되어 서라>, <게시판>, <항쟁의 노래>, <하염夏炎>, <별똥별>, <1980년에 부쳐>, <삼원색三原色의 노래>, <칸나꽃 전설>, <계시啓示>, <못잊을 그날>, <배신의 밤>, <어느 도시>, <화살>, <이 하늘 아래 살면>, <새의 암장暗葬>
제2부/ 불사조
<풀잎 돌아눕는>, <민주주의>, <나는 무덤에 들어서도>, <우리의 기旗는>, <나의 제목>, <잡초원에서>, <아침나라 사람>, <나는 사랑한다>, <시인의 멍에>, <불사조>, <속 삼국시대>, <비상계엄령>, <독사毒蛇 이야기>, <어느 탑 앞에서>, <산이여 통곡하라>
제3부/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들불>,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조국상실자>, <소년아 깃발을 세워라>, <이 겨울은 망각이고저>, <어둠의 사닥다리>, <봄눈>, <멍석달>, <바람 속에 흙바람 속에>, <진혼가>, <농조弄調>, <노령산맥>, <시인의 죽음>
제4부/ 아네모네 일기
<최루탄ㆍ1>, <최루탄ㆍ2>, <풀잎>, <찡그린 하늘>, <쇠창살>, <참새>, <거미줄>, <과녁>, <대낮의 춘사椿事>, <어느 火刑日>, <5월, 태풍의 눈>, <아네모네 일기>, <데모>, <5월제>, <촛불 데모>, <고문 받던 날>, <우는 살>
제5부/ 무등산
<진달래꽃>, <무등산>, <촛불>, <사모곡>, <소쩍새>, <까마귀>, <산다화>, <월견초>, <백록담>, <강강수월래>
여기서 1ㆍ2ㆍ3부는 광주항쟁 시편들, 4부는 민중의 시편들, 5부는 시조시편들을 중심으로 엮어져 있다.
안도섭 시인은 머리말에서 “나의 노래는 이 나라 사람으로서 참된 삶을 살려는 목소리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목소리는 단순한 외침이나 항거만은 아니다. 이 목소리는 멀리 동학농민운동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으며, 한겨레 얼로 떨쳐나섰던 저 3ㆍ1항거와 4ㆍ19혁명의 빛나는 자취를 거쳐 맥맥이 이어 온 지극한 양심의 눈뜸이며, 하늘 닿는 소리인 것이다. 우리는 또다시 개벽의 아침을 밝히려는 역사 앞에 다가 서 있다. 이제 이 억울한 노래들이 당당히 햇빛을 볼 수 있게 되었음을 이 나라 온 겨레와 더불어 기뻐해마지 않는 바이다. 실로 우리는 누런 손과 얼크러진 밤의 요물들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못다 이룬 넋들의 아침을 달려 나서야 할 때이다. 나의 노래는, 다시금 피가 통하는 언어로 맥박치고 겨레의 심장이 드높게 고동치는 하늘 아래 멀리 메아리 져, 풀잎처럼 끊임없는 내일을 숨쉬어 갈 것이다. 바라건대, 이 노래가 밝은 하늘을 찾는 이들의 한갓 벗이 되고 어둠을 가르는, 우는살이 되어 준다면 더 없는 보람이 아닐까 한다.”라고 적고 있다.
2. 서정미가 눈부시게 돋보이는 민중항쟁 시편들
안도섭 시인은 1933년 전남 보성 출생이다. 앞에서 이미 밝힌 바 있지만, 그는 195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와 평화신문 신춘문예에 각각 당선되면서 문학 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현대문학』 기자와 대한일보 기자로 일한 바는 있지만, 각종 문학 단체나 기관에 관여하는 일에 거리를 두면서 지금까지 오로지 순수 창작활동에만 전념해 왔다. 그와 같은 사실은 소위 ‘문학권력’으로부터 소외당하는 요인이 될 수 있었고, 안도섭 시인도 문예지나 언론 등을 통해 그의 작품들을 문단에 널리 알리려 크게 애쓰지도 않았다.
그는 지금까지 ≪지도地圖속의 눈≫을 비롯한 14권의 창작시집과 ≪한 잔의 찻잔에 별을 띄우고≫를 비롯한 4권의 에세이집, ≪청춘의 역설≫을 비롯한 7권의 소설집 등 많은 작품집들을 출간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이 세상에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못한 연유를 굳이 찾는다면 바로 그런 점들에 해당되지 않을까 한다.
안도섭 시세계의 가장 큰 특징은 서정성에 있다. 두 번째 특징은 그에 못지않게 역사와 시대적 인식이 강하다. 시대적 인식이 강하다는 것은 현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뜻한다. 서정성과 현실성은 어떤 측면에선 조화롭지 못하고, 자칫 어느 한 쪽의 특성도 살리지 못할 수 있으나 안도섭 시인은 그 둘 사이에서 곡예사처럼 아주 절묘한 조화를 구사하는 그 만의 탁월한 시세계를 구축해 왔다. 그의 시세계를 잘 아는 몇몇 시인들의 평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안도섭의 작품은 신석정의 작품세계에서처럼 역사와 시대적 인식을 근간으로 하는 현실참여적 서정시를 쓴다.(김희수, ≪한국 민족문학과 민족시인론≫, 푸른사상, 2002)
안도섭의 문학을 관류하고 있는 것은 역시 짙은 서정성이다. 그의 시는 이 서정성을 바탕으로 역사와 시대에 항거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 구호라는 늪에 빠지지 않고 예술적으로 승화되고 있다.(백수인 교수, 조선대 신문, 98.5)
안도섭 시인의 시 전체의 흐름은 이향아李鄕莪, 조봉제趙鳳濟 두 시인이 언급했듯이 현실적 서정의 시각에서 공동체 의식과 서정의 조화를 이루었다고 본다.(장석향, <안도섭 시평>)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다수의 시인들이 안도섭의 시세계에 대해 상당히 일관된 평가를 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제 안도섭의 시세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5ㆍ18민중봉기 현장의 모습들을 담아낸 그의 시편들을 하나하나 감상해보자.
마른 잔디에 불을 놓자
이 더디 오는 봄
불을 놓아 새날 재촉하자
들불이 탄다
진달래 등불 번지듯
불붙는 잔디
훨훨
불길 속에 겨울이 탄다
묵은 검불이 타오른다
이 강산 봄을
더디 오게 하는 자 누구냐,
불길 속에 온갖 미움도 탄다
꽃샘바람 휘모는 온 동네,
개나리도 아침을 웃는
천지에 봄기운 차오르는데
마른 잔디에 꽃불 놓자
다가오는 새봄
우리 달려가 한아름 아침해 안자
— 안도섭, <들불> 전문
<들불>에서는 이미 군화에 짓밟혀 버린 현실에 대해 이 시는 겨울의 검불이 타 번지도록 들불을 놓자고 시인이 노래하고 있다.
제4연에서 ‘봄을 더디게 오는 자 누구냐’고 저항을 분출시키며 꽃불 뒤에 오는 새봄을 손짓하는 대목이 특히 주목된다.
꼭두새벽 눈 붙이면
내 하루는 뭉개진 톱날
해 거꾸로 뜨고
달 비뚜로 지는
네 벽 지하실,
꼬다케 전등이 시럽고
미움에게 쏟는
언어도 사위는 인동忍冬인데
저 손가지 친 담장
마른 넌출들 눈 핥는
이 겨울은 차라리 망각이고저
— 안도섭, <이 겨울은 망각이고저> 전문
<이 겨울은 망각이고저>에서는 고통스런 당시의 나날을 그저 잊고 싶을 뿐이란 시인의 심정을 읽을 수 있으며, 그것은 어찌 시인만의 심정이었겠는가. 모든 사람들의 한결 같은 심정을 시인이 시로써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뭉개진 톱날’은 곧 계엄하 잃어버린 자유와 민주주의가 학살당한 삶의 현실이다. 이런 현실에서 시인은 네 벽 지하실, 시린 전등 아래 언어도 사위는 겨울을 차라리 잊고자 하는 패러독스가 서린 시다.
이른 봄 새잎 돋는 나래들
우뢰 속 비바람에도
푸른 혼 뉘누리 치고
돌멩이 구르는 길가,
혹은 들녘에서도
자유 그리워 일렁인다
홰치는 새벽
맑은 구슬 맺히면
창을 밝히우는
그날의 합창 즐겨 노래한다
— 안도섭, <풀잎> 전문
위 시에서 언급한 ‘풀잎’은 자연의 그것이자, 권력으로부터 격리된 그런 존재의 풀잎을 말한다.
시인은 제3연에서 ‘돌멩이 구르는 길가,/ 혹은 들녘에서도/ 자유 그리워 일렁이는’ 그 풀잎은 끝연의 ‘창을 밝히우는/ 그날의 합창 즐겨 노래한다’고 하면서 어둠과 현실의 질곡이 사라지는 날 그리워 ‘푸른 혼’ 물결치기를 갈망하고 있다.
저 하늘 닮아
나는 비감悲感이 얼굴에 싸인다
가을 빗속에
부서지는 빗방울 소리
나의 키나무는
생잎 떨친 가지되어
세월을 앓고
새야
새야
불을 삼킨 새야
너마저
둥우리를 떠나면
우리의 방房이 허전쿠나
가을이 찾는
이 아침에도 비구름이 인다
— 안도섭, <찡그린 하늘> 전문
위 시 <찡그린 하늘>은 ‘밝음’을 지워버린 하늘이라고 시인이 말한다. 그런 가을, ‘불을 삼킨 새’는 둥지를 떠나 현실의 비정非情을 통감케 한다고 시인은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밝음’이 지워지고 ‘불을 삼킨 새’가 둥우리를 떠나고, 그래서 방房이 허전하고 “가을을 찾는 이 아침에도 비구름이 인다.”고 말하니 시인의 심정이 얼마나 비통한가를 알 수 있다.
누구의 살빛 머금은 웃음인가
슬프다 못해 차가운 꽃 진달래
꽃샘이 휘불리누나 아픔의 벼랑길
세월도 희붐는다 저어기 산모통이
그대의 소식인양 밝아오는 동녘
정녕코 사랑이어라 한서린 불꽃덩이
— 안도섭, <진달래꽃> 전문
‘진달래’는 봄의 상징으로서, 꽃샘 벼랑에서도 희망을 손짓하며 다가오는 꽃의 이미지를 상징한다. 1연에서 진달래가 ‘슬프다 못해 차갑다’고 표현되고 있다. 어쩌면 당시의 상황에선 진달래란 존재가 아마 누구에게나 그런 느낌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1920년대식 사랑이 갖는 아름다움을 노래한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과는 서정성과 운율은 비슷하되, 내용적으로 상당부분 대조적인 면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 김소월, <진달래꽃> 전문
사르르 백옥白玉의 살 저미는 눈물
꽃심지 밝히어 사랑의 불길 타는
우주줄 춤추는 넋 혀끝 달는 혼이여
— 안도섭, <촛불> 전문
<촛불>에서는 스스로를 불태워 어둠을 사르는 촛불의 형상을 ‘춤추는 넋’, ‘혀끝 달는 혼’으로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탁월한 시조시로서의 가치도 엿보인다.
우리집 초가을 수구화 피면
손바닥 닮은 잎잎 초록이 짙고
뒷동산 대숲 쑤국새 울면 하늘은 원색
흰머리 날리시는 어머니 뱀잔등 넘고
뙤약볕 호미질에 등이 단 배적삼
뒤안길 샘가 밥티꽃 피면 그리운 그날
— 안도섭, <사모곡> 전문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어머니의 사랑을 잊을 수 있는 사람 누구이겠는가. 많은 시인들이 ‘어머니’를 주제로 시를 써서 발표하기도 했지만, 안도섭 시인의 <사모곡>은 좀 특이하다. 그리움을 쑤국새 우는 뒷동산, 호미질에 등이 단 베적삼의 기억으로 되살린 시조시다.
앞뒷산 두견새 먹구름 찢더니
마당가 피어난 한 그루 목련
살 에는 아픔도야 멍울진 대샆까끔……
초생달도 한 허릴 감추면
모질게 먹피 쏟아 예는 귀촉도
소따꿍 소쩍 소쩍새 피울음 운다
— 안도섭, <소쩍새> 전문
위 시 <소쩍새> 역시 안도섭 시인다운 서정미가 듬뿍 묻어나는 서정시 중 한 편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시인은 크레파스로 색칠한 듯 원색原色의 언어들이 귀를 파는 소쩍새의 피울음에서 암울한 시대의 그림자를 얼비치게 하는 시조시다.
눈보라 속 그 잎들 파릇하더니
인동忍冬의 설움에도 붉게
꽃망울 터진 진홍의 입술
겨우내 숨겨 온 밀어密語들이
그토록 봉싯봉싯 맺히어
파아란 하늘가에 피도곤 산다화는 피는가
— 안도섭, <산다화> 전문
인동忍冬! 산과 들의 양지바른 곳에서 자라고 길이가 약 5m이다. 줄기는 오른쪽으로 길게 벋어 다른 물체를 감으면서 올라간다. 겨울에도 곳에 따라 잎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인동이라고 한다.
시인은 <산다화>에서 ‘인동忍冬’, ‘밀어蜜語’ 등의 시어로 군정軍政에 대한 저항의식을 알레고리의 수법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시조시에 해당된다.
휘영청 달밝은 무등의 그리메
고단한 꿈들 네 벽 안에 사위면
촛불을 켠 월견초 송이송이 피고
고향의 어머니 선잠 깨어
이 아들 근심을랑 뇌시는지
불현듯 달 그림자에 어리는 듯……
갇힌 새장 속 새되어 울면
비구름 무시로 붉은 담벼락 넘고
쓸쓸히 웃는 노랑꽃 쇠울의 전설이여
— 안도섭, <월견초> 전문
이 <월견초>는 안도섭 시인이 신군부에 의해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을 때 쓴 시다. 감옥에 갇혀 있던 시인은 달빛 어리는 창틀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이 뜬 창틀 밖에 월견화를 보자 시인은 감흥을 일으켜 즉흥시를 쓴다. 그의 피부 혹은 가슴에 절절이 배인 감정이 시로 형상화 되어 있다. 제3연에서 ‘새장 속의 새’는 자유를 앗긴 몸을 일컬으며, 그것은 ‘노랑꽃 쇠울의 전설’이라는 은유로 표현되고 있다.
위에서 감상한 <들불>, <이 겨울은 망각이고저>, <풀잎>, <찡그린 하늘>, <진달래꽃>, <촛불>, <사모곡>, <소쩍새>, <산다화>, <월견초> 등 열편의 시들은 참으로 아름다운 서정시다. 안도섭 시인만의 탁월한 서정적 감각이 살아 넘치는 바로 그런 시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잘 살펴보면 저항적 시어들이 군데군데 파편처럼 널려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시적 메타포가 매우 잘 구사되어 얼핏 보기엔 저항시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이다.
즉, 위 시들은 시집 ≪어느 火刑日≫에 수록된 관계로 5ㆍ18민주화운동 관련의 의미가 농축되어 있을 것이란 판단을 쉬 가능케 하지만, 그런 선입견이 없는 시각으로 바라보았을 때는 저항시라고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서정시로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위 시들이 2004년에 출간된 안도섭 시인의 창작시집 ≪돌에도 꽃이 핀다했으니≫에 실렸더라면, 아마 누가 보든 저항시가 아닌 일반 서정시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란 의미이다.
그만큼 안도섭은 서정성과 저항성 혹은 현실성이 절묘하게 결합 또는 분리될 수 있는 뛰어난 시적 역량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위 <들불>, <이 겨울은 망각이고저>, <풀잎>, <찡그린 하늘>, <진달래꽃>, <촛불>, <사모곡>, <소쩍새>, <산다화>, <월견초> 등의 시들은 처절했던 상황속의 5ㆍ18민주화운동 관련 민중항쟁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서릿발 같은 신군부 정권의 총칼에 맞선 저항문학 계열의 작품들이다.
안도섭 시인에 대해 ‘서정시를 바탕으로 역사와 시대에 항거한 문인’이라 흔히 일컫는 이유 중 하나에 해당되는 대목이다.
3. 5월 하늘에 살아 있는 안도섭의 시편들
고 은 시인은 ‘광주 5월 민중항쟁 이후의 문학’이란 제하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광주의 시인들에 의해 항쟁의 정서적 실감은 그 암울한 공포정치의 현실 밑바닥으로 터져 나가 전국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과연 시와 시인의 역할은 엄청난 것이라는 체험은 새삼스러웠다.
항쟁 직후의 핏자국과 총구멍이 그대로 남겨진 5월 하순의 광주를 노래한 김준태의 <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가 그것이다. 이것에는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하느님도……떠나가 버린 광주여” 따위의 말들이 풍겨주는 종교적 진부함이 없는 것은 아니나 항쟁 직후 이만한 시를 확대 계엄령의 검열로 찢어 발겨지면서까지 발표할 수 있었던 그 시적 충동은 높이 평가되기에 충분한 바 있다. 그 뒤로 문병란을 비롯한 광주의 기성 시인을 아울러 젊은 시인들의 대거 출현으로 ｢오월시｣와 그 밖의 광주 문학은 우리 민족문학운동에서 항쟁문학 또는 항쟁 이후의 문학에 매우 굳건한 실체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오월시｣를 뛰어넘으려는 야심으로 일어난 ｢해방시｣ 역시 광주항쟁의 산물임에 틀림없다. 이런 문학운동은 무엇보다도 광주민중항쟁 자체의 역사적 의의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특히 항쟁 이후의 이데올로기적 위상으로 볼 때, 이데올로기의 특질은 반드시 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 광주민중항쟁은 먼저 말의 빈곤을 메워야 하는 임무가 급선무이기도 했다.(고 은, ‘광주 5월 민중항쟁 이후의 문학’에서)
김용택 시인이 ‘5월’이란 제목으로, 김정환 시인이 ‘철쭉꽃 5월에—철쭉제인지 꽃인지 기억이…’라는 제목의 시를 발표하는 등 5월과 관련한 작품들이 여럿 있지만, 안도섭 시인도 그 5월을 그냥 지나치진 않았다.
이 살 속
화살이 꽂힌다
어디선가
한밤의 울음소리
네 벽에 갇힌
가슴을 자맥질하고
한밤의 울음소리
어둠 찢는 듯
주검처럼 누워
자꾸 화살이 꽂힌다
— 안도섭, <화살> 전문
<화살>의 1연과 5연에서 우리가 볼 수 있듯이 시인은 몸속에 ‘화살’이 꽂히는 듯한 아픔을 느끼고 있다. 2연과 4연에서의 ‘울음소리’는 누군가가 죽었거나 크게 다쳤거나 그를 바라보는 어떤 이가 목놓아 터뜨리는 분노의 소리일 수도 있고, 슬픔의 울부짖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분노와 슬픔이 얼마나 큰지 3연과 4연에서 ‘가슴을 자맥질한다’와 ‘어둠 찢는 듯’하다고 강조한다. 그런 아픔을 시인도 함께 느끼면서, 그렇지만 5연에서 시인이 ‘주검처럼 누워’라고 말하듯,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상태로 어쩌지를 못하고 그저 ‘화살’을 맞는 아픔만 느낀다고 하는 것이다. 이 시를 통하여 우리는 5ㆍ18민중항쟁 당시의 처절했던 항쟁현장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바람 속에 흙바람 속에
트여오는 하늘
우랄타이 별들이
숨어버린 동구 밖
새눈 트는
신록의 빛 가슴 안에 묻고
기렸던 풀잎들의 덩실춤,
5월의 꽃가지
그 이야기도 좋을시구
우리 열린 하늘 아래
기旗 하나 꽂고
나리꽃 짙은 향기 속에
탱고춤이라도 출거나
아니, 꽹과리 두들겨 꼽새춤
북북북 앉은뱅이춤
풀잎들의 너도나도춤 어우러지리
— 안도섭, <바람 속에 흙바람 속에> 전문
<바람 속에 흙바람 속에>는 산문시로서, 안도섭 시인의 시세계에서는 형식상으로는 드물게 발견되는 시편이다. ‘덩실춤’, ‘탱고춤’, ‘꼽새춤’, ‘앉은뱅이춤’, ‘너도나도춤’ 등 독특하고 다양한 ‘춤 품새’의 시어들로 민중의 행동과 호흡, 그리고 정서를 그려내고 있다. 마지막 행의 ‘풀잎들’조차 민중에 함께 어우러지고 있다고 표현하는 대목에서는 아무도 신군부의 세력을 인정치 않고 있음을 시인이 넌지시 말해주고 있다.
그대들 자유 그리워
어느 섬 스스로 갇히었는가
빵도 마다하고
배움마저 뒤에 한 채
낯선 울안 날아든 불나비들
그 황홀한 춤에 놀라
— 아무 말이 없는가,
— 꽁꽁 얼어붙어 버렸는가,
친구여, 어서
갈구渴求의 목마름 추겨주고
단비 좀 시원스레 맞자꾸나
온 세계 이목耳目
서울에 몰린 5월, 태풍의 눈
스스로를 태워
꿈을 행동하는 불나비들 — 그 혼신이여
— 안도섭, <5월 태풍의 눈> 전문
<5월 태풍의 눈>은 제목부터가 저항성을 직설적으로 다가오게 한다. ‘5월’ 그리고 ‘태풍의 눈’이라는 두 가지 표현이 담긴 제목에서 벌써 시를 읽는 이들이 시인의 의중을 간파하게 되고 시인이 무엇을 말하려고 함인지 그 시작詩作 의도에 압도당하고 만다. 1연과 2연에서 자유를 외치다 영어의 상태가 된 민중들의 존재를 먼저 인지시킨다. 그리고 3연과 4연에서는 신군부 세력의 자세를 질타하면서 동료와 민중들이 힘을 더 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마지막 5연에서 당시의 상황이 이미 전 세계로 전파되었으며, 그것은 이제 엄청난 파란을 일으키게 될 것임을 시인이 말하고 있다. 그리고 민중들의 행위는 정당하며 아름다운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도 허리께 잘린
5월의 지도에는
별빛이 총총 박히어 온다
밤은 밤을 낳던 밤,
시간도 언어도 재갈 물린
거리 모퉁이 서면
웬 호각소리
야윈 가슴 흔들 듯
밤의 육체 속 파고든다
이제 마른 명태처럼
핼쑥해진 자유의 빈집,
그 제단 앞에 꽃잎이 진다
이른 봄에도
초여름에도 흩날리는 이름들,
남녘 하늘엔 천둥도 울어온다
— 안도섭, <1980년에 부쳐> 전문
<1980년에 부쳐>는 시인이 5ㆍ18민주화운동의 의미와 가치를 되새기며 그 한없는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1연의 ‘5월의 지도’, 2연의 ‘시간도 언어도 재갈 물린’, 3연의 ‘웬 호각소리’, 4연의 ‘마른 명태처럼 핼쑥해진 자유의 빈집’ 등에서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듯하다. 그리고 4연에서 ‘그 제단 앞에 꽃잎이 진다’와 5연에서 ‘이른 봄에도’, ‘초여름에도’, ‘흩날리는 이름들’, ‘천둥도 울어온다’는 구절로 처절하리만큼 아픈 심정을 읊조리고 있다.
내 사는 4월은 너무 깡마르고
네 사는 5월은 너무
움츠러 있다
어린 고사리 손,
풀잎 숨결마저도
기진해 돌아눕는 일월日月
이 골 저 골짜기
메아리져 오는 땅 검은
포효소리……
무등의 구름밭에서도 뚝뚝
이슬방울 지면
지심地心에 갓 핀
심장꽃 한 송이
너 더욱 가슴에 쓰라리누나
— 안도섭, <풀잎 돌아눕는> 전문
<풀잎 돌아눕는>에서는 안도섭 시인이 오랜 기간 원천적으로 지니고 있는 저항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이 시는 5월 하늘, 즉 5ㆍ18민주화운동 당시의 상황을 노래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동엽의 ≪학생혁명시집≫에 실린 <누가 막을 수 있었으랴>란 시에서도 살펴볼 수 있지만, 안도섭 시인이 4월 하늘, 즉 4ㆍ19혁명 당시에도 저항정신이 드높았음을 알 수 있듯, 여기서도 그런 저항정신과 저항시 세계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느끼게 한다. 1연의 ‘내 사는 4월은 너무 깡마르고’가 바로 그 대목이다.
어쨌든 당시 상황임을 암시하는 ‘5월’은 절기로는 꽃샘추위도 벌써 자취를 감추었을 때임에도 ‘너무 움츠러 있다’고 말한 시인의 의중이 무엇이겠는가. 2연에서 ‘어린 고사리 손’과 ‘풀잎 숨결’마저도 기진해 돌아눕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세상모르는 철부지 어린아이와 풀잎조차 돌아누울 정도로 신군부에 대한 반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는 사실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3연에서 ‘포효소리’는 필경 감옥에서 악랄한 고문 끝에 쏟아져 나오는 신음이며, 그것은 결코 굴복할 수 없다는, 우뢰와 같이 큰 의지의 외침인 것이다.
4. 해학ㆍ풍자적 메타포의 저항시편들
안도섭 시인의 시편들은 현실 저항적 인식이 강하게 표출된 체제 저항적인 작품들에서도 서정성을 바탕으로 상징, 풍자, 알레고리 등의 다양한 기법을 사용하여 비판의 강도를 조절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백수인 교수, 조선대 신문, 98.5)
그런데 유머가 없는 인간 생활은 얼마나 딱딱할까? 아마 유머야말로 우리 생활과 문화에 더 없이 소중한 요인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문학도 우리 생활의 일부이며 문학 속에 자리하는 유머는 문학의 운치를 높여주는 데 큰 기여를 한다. 우리가 살다가 때론 심각하고 무거운 상황 혹은 역겹도록 더러운 상황 혹은 5ㆍ18민주화운동 당시와 같은 살벌함과 공포, 울부짖음, 분노 같은 것들이 온 세상에 꽉 차 있던 그런 상황까지도 맞게 되지만, 그런 상황일수록 인간에게 힘이 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유머, 즉 해학일 것이다. 살다보면 때론 엄청나게 어려운 지경에 놓이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마냥 얼굴만 찡그리거나 괴로움으로 몸부림만 치거나 머리만 쥐어뜯으며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때론 한바탕 웃음 혹은 비웃음을 폭탄처럼 날려 상대편의 간장을 서늘하게 만드는 일도 필요할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론 자신의 의연함이요 강인함이요 노련함을 나타내 주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시작詩作을 시도한 것으로 보이는 안도섭 시인의 여러 시편들이 ≪어느 火刑日≫에서 발견되고 있다. 한 마디로, 해학성 메타포가 매우 돋보이고 저항정신 또한 그에 못지않게 표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창회 수필가(전 동국대학교 교수)는 그의 저서 《수필문학론》(한누리, 1994)에서 문학이 갖는 유머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학술적으로 보아 유머는 대개 3가지 이론이 있다.
첫째, 우월감(superiority) 혹은 格下(degradation)의 상태에 있을 때 웃음이 만들어지는데, 곧 인간의 어리석음(absurdity)이나 유별남(oddness)이나 결함(infirmity)같은 것들이 우리를 웃긴다고 했다.
둘째, 불일치(incongruity), 기대좌절, 두 생각의 엇갈(bisociation) 등이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는 학설이다.
셋째, 프로이드는 긴장(tention)으로부터 해소되거나 금지(혹은 억제:inhibition)로부터 놓여나올 때 웃음이 터진다고 보는 학설이다.
결과적으로 첫 번째의 우월감이나 격하의 이론은 풍자(satire), 비꼼(sarcasm), 불행(misfortune)의 웃음이고, 두 번째의 불일치와 엇갈 이론은 훨씬 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익살의 웃음을 주지만, 세 번째의 프로이드 이론이 현재까지는 유머론 중 가장 우세하다고 논술하고 있다.
안도섭 시인은 매우 탁월한 해학성과 풍자성을 지닌 작가이다. 시면 시, 소설이면 소설, 그가 평생 창작해온 수많은 작품들 중 곳곳에서 해학성, 풍자성이 나타나고 있는데, ≪어느 火刑日≫에 게재된 여러 시편들에서도 해학ㆍ풍자ㆍ기지가 눈에 띄게 많이 발견되고 있다.
별들이 이슬 젖은 눈짓으로
소근거릴 때
재너머 떠오르는 멍석달
산마을
메아리도 잦아진 골
유령의 탈 쓴 해골바가지 뜨고
월출산
상상봉에 뜨는 달은
무슨 달
베틀에 시름 짜던
어머니 근심 달
화악산
칼바위에 뜨는 달은
무슨 달
미움 돌팔매하던
친구 사무치던 달
밤을 쫓자고 그 밤 몰아내자고
위어이 달려나섰던 달
벌떼처럼
한밤 밝히던 달
— 안도섭, <멍석달> 전문
<멍석달>은 다분히 해학성을 띠는 시로써, 멍석달이 ‘유령의 탈 쓴 해골바가지’라는 비유를 통해 현실을 풍자하고, 농조弄調 끝에 한밤을 밝혀내자고 은밀히 시사한다. [‘월출산 상상봉에 뜨는 달’—‘어머니 근심 달’], [‘화악산 칼바위에 뜨는 달’—‘미움 돌팔매하던 친구 사무치던 달’], [‘그 밤 몰아내자고 달려 나섰던 달’—‘한밤 밝히던 달’] 등으로 각 연에서 달의 의미가 각각 상대화相對化하고 있다. 그 각각의 달이 지닌 의미도 그렇거니와 신군부 세력에 대한 저항적 의미가 시의 저변에 흥건히 고여 있다.
태생이 어디냐고,
남녘 외진 개땅새라네
왜정 때
설움 받던 닭띠 태어나
보리피리 불고
진달래나 씹고 살았지예
화약냄새 자욱한 안개
비리붙는 것들 싫어
청하늘 우러른 한글주의자 라네
허면 잘못이 있다고,
허허, 과녁으로 뚫어보지 마오
창밖 드맑은 눈으로 아침에 서오
뭘 빈정대느냐고,
그래, 늬들 잘난 세상이니
개똥벌레에도 슬슬 기어나 살지
— 안도섭, <고문 받던 날> 전문
<고문 받던 날>은 신군부에 의해 살벌한 분위기에서 육체적 고통 혹은 인간이기를 포기하라는 식의 모멸적 언어폭력을 당해가며, 그렇게 심한 고문을 받던 날에도 시인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이는 해학성이 아주 탁월하지만 그것은 해학을 위한 해학이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는 자신의 떳떳함에서 한바탕 비웃어주지 않을 수 없는 상대의 수작을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태생’—‘개땅새’], [‘허면 잘못이 있다고,’—‘허허 과녁으로 뚫어보지 마오’], [‘뭘 빈정대느냐고,’—‘그래 늬들 잘난 세상이니/개똥벌레에도 슬슬 기어나 살지’] 등의 질문과 답변의 형식을 빌린 점도 재미있다. 내용적으로야 극도의 긴장감이 내재하지만, 운율과 표현이 마치 소설을 잃듯 자연스러운 가운데 풍자성이 어우러져 있다. ‘왜정 때 설움 받던 닭띠’, ‘진달래나 씹고 살았지예’, ‘비리 붙는 것들 싫어’ 등 각 행에서 나타나는 해학성과 풍자성, 게다가 저항성이야말로 단연 수작으로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오뉴월
꾸정물통에
호박씨 떴네
호박씨 떴네
이가李哥 헝클어 놓은 땅
장張이 망해 먹고
장張이 망해 가고
짐짓 달빛도 환한데
꾸정물통에
호박씨 떴네
호박씨 떴네
사람들아
우리 살아 온 일
지긋지긋 살아 온 일
설움이 맺혔는데
오호라 망할 징조
예서도 눈에눈에 선하다
이가李哥
장ㆍ장가張ㆍ張哥
못다 버린
꾸정물통에
호박씨 떴네
호박씨 떴네
쥐도 새도 총알 바우러
비낀 세상
절간에 빈대맛도 좋을씨구
얼싸 좋을씨구
인골적人骨笛 불며 춤추는
십오야十五夜
긴긴 밤을 꾸정물통에
호박씨 떴네
호박씨 떴네
— 안도섭, <농조弄調> 전문
<농조弄調>에서는 ‘꾸정물통’, ‘호박씨’, ‘이가李哥 헝클어 놓은 땅’, ‘장張이 망해 먹고’, ‘오호라 망할 징조 예서도 눈에눈에 선하다’, ‘이가李哥/ 장ㆍ장가張ㆍ張哥’, ‘쥐도 새도 총알 바우러/ 비낀 세상’, ‘절간에 빈대맛도 좋을씨구/ 얼싸 좋을씨구’, ‘인골적人骨笛 불며 춤추는/ 십오야十五夜’ 등 각 행과 낱말에 섞인 해학성에 살벌함과 공포는 어느덧 사라지고 오히려 덩실덩실 어깨춤이 쳐질 정도다. 특히 ‘호박씨 떴네’의 반복은 그 풍자적 의미는 물론 시 전체에 기여하는 운율성까지 매우 뛰어나게 한다. 뿐만 아니라, <고문 받던 날>과 더불어 이 시 <농조弄調>도 신군부의 부당성을 심하게 힐난하는 저항정신으로 흠뻑 젖어 있다.
어— 잡귀들 물러거라
신록의 축제런 듯
한얼의 차돌멩이들 모여
징징북북 울러메는 소리
어— 아침해 흐리는 먹통귀신,
철 모르는 까막귀신,
때없이 눈물 흘리는
사과탄, 지랄탄귀신 물러가라
제상 머리에는
화형火刑당한 삼시랑 넋,
삥 둘러 미움 재 뿌리고
앞뒷산 떠나갈 듯한 마당굿 뱅뱅
어— 5월을 좀먹는 시절귀신,
한 허리 토막낸
얼치기 깡통귀신 물러가라
저 골 메아리도 좋을씨구 한판 어우르는
소리……
— 안도섭, <5월 제> 전문
굿은 왜 하는가? 굿판은 어떨 때 벌이는가? 집안에 큰 우환이 있을 때, 그 우환을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해결하려다 도저히 해결이 되지 않을 때,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마지막 방법으로 선택하는 것이 바로 굿판 아니겠는가? 시인은 당시의 상황을 이제 굿판이나 벌일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으로 규정하고 <5월 제>란 시로 그 심정을 나타낸다.
‘어— 잡귀들 물러거라/ 한얼의 차돌멩이들 모여/ 징징북북 을러메는 소리’, ‘먹통귀신’, ‘까막귀신’, ‘지랄탄귀신’, ‘삼시랑 넋’, ‘시절귀신’, ‘얼치기 깡통귀신’, ‘한판 어우르는 소리’ 등 <5월 제>에서 보여주는 신조新造 시어들이 참으로 돋보이고 눈길을 사로잡는다. 5ㆍ18민주화운동에 참여한 민중들의 어깨를 들썩케 하기에 충분했으리라 짐작된다.
옛날적 불티몰던 임진란 소소리
산봉에 붙는 봉화 고을고을 울리고야
한마당 배꽃으로 피었나 가앙가앙 수월래
아기놈 꼬옥꼬옥 숨겨라 큰 한 소리
은어 떼 푸웅덩 호수에 몰리고야
쇠스랑 대창도 들고너라 가앙가앙 수월래
서산에 달이 지고 첫닭 우는 횃소리
님떠날 고개고개 시간이 바쁘고야
한시름 떨쳐나선 낭군아 가앙가앙 수월래
— 안도섭, <강강수월래> 전문
‘강강수월래’란 노래는 과거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실상 12척의 배로 10배가 넘는 왜군들의 배를 무찌를 때, 12척밖에 남지 않은 배와 적은 군사들의 사기저하를 어떻게든 극복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만든 노래다. 여자들이 강강수월래를 하는 것을 이순신 장군이 바라보고는 그것을 전략화 한다. 그래서 군사들은 밤에 횃불을 들고 밤마다 강강수월래를 한다. 왜적이 보기에는 아직도 조선의 군사가 수천, 수만에 이르는 것으로 착각하고 사기가 떨어져 패전하는 원인 중의 하나가 됐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 옛날부터 달의 운행을 중심으로 농사를 지었던 우리나라 고유의 민속놀이이기도 했다. 아무튼, ‘강강수월래’는 우리 즉 한민족의 어깨를 흥겹게 들썩이게 하고 힘을 결집시키는 노래임에는 틀림없다.
안도섭 시인은 <강강수월래>에서 신군부를 아예 과거 임진왜란 당시의 왜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하여 시에서 민중들과 함께 강강수월래를 하면서 흥겨움 아닌 흥겨움으로 민중들을 위로하고 있다.
여기서 특히 돋보이는 시귀들은 ‘고을고을 울리고야’, ‘가앙가앙 수월래’, ‘쇠스랑 대창도 들고너라’, ‘님떠날 고개고개 시간이 바쁘고야’ 등인데, ‘쇠스랑 대창도 들고너라’라는 대목은 분노가 극단으로 치닫는 시인과 민중의 심정으로 풀이되며, 필경 신군부의 간담이 서늘해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Ⅴ. 마치면서
≪어느 火刑日≫에 대한 문학성과 문학사적 의의를 필자 나름대로 정리하자면, 우선 한 민족시인이 5․18민주화운동을 지켜보면서 체득한 슬픔과 분노의 단상들을 시로 적절히 승화한 작품들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광주에서의 아픈 경험과 상처를 시적으로 고스란히 나타내어 그 의미를 되새긴다는 측면과 거기에서 희생된 영령들의 뜻을 기릴 수 있다 할 것이다.
안도섭 시인은 저항시인으로서의 이미지가 지금까지 항간에 그다지 고착화되지 않았을 뿐, 사실상 국내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저항시인이라 할 수 있다. 5ㆍ18 관련 저항시도 그러려니와 5월 하늘(5ㆍ18민주화운동)의 훨씬 이전인 3월 하늘(3ㆍ1절)과 4월 하늘(4ㆍ19혁명)에서도 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4월 하늘(4ㆍ19혁명) 아래에서 쓴 시가 바로 <누가 막을 수 있었으랴>가 아니겠는가.
김희수 문학평론가의 ≪한국 민족문학과 민족시인론≫을 살펴보더라도 맥락이 같음을 알 수 있다.
4ㆍ19혁명을 기점으로 우리의 문단은 또 다른 변화를 가져온다.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도 민주화와 근대화가 상호충돌 현상을 보이며 자유와 평등의 구조적 모순을 초래한다. 시문학에도 변화가 온다. 크게 세 가지 개념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첫째는, 전통적 서정주의를 계승한 시.
둘째는, 주지적인 새로운 기교의 시.
셋째는, 현실참여 및 민중과 호흡하는 시.
전통적인 서정주의를 계승한 시는 종래 자연파 시인들이 형성했던 시 세계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구성하였다. 이들은 이형기, 박성룡, 박용래, 박재삼, 이성교 등이며 신앙과 사상을 가미한 서정성과 낭만성을 지향했다. 이들과는 달리 주지주의의 새로운 기교를 우선하는 모더니즘적 시를 쓴 시인들은 현대시의 지나친 현실 집착과 서정에 탐닉하는 것을 반대하며 주지성과 예술성 위주의 시를 썼다. 대표적 시인으로는 김춘수, 김종삼, 김광림, 문덕수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들은 시ㆍ공간의 해체와 더불어 문법구조의 파괴를 통해 시어를 자연스럽게 하는 데 초점을 두고 전개했다. 김춘수는 내면의 세계를 이미지로 형상화하였고, 김종삼, 김광림, 전봉권은 합동시집 ≪전쟁과 음악과 희망과≫를 출판하였다. 이 시집에서 이들은 관념을 배제한 대상 연구와 추상적 이미지를 통해 의식의 내면세계를 그렸다.
이들 두 가지 개념의 시세계와는 달리, 현실참여 및 민중과 호흡하는 시를 추구하는 시인들은 김수영, 신동엽, 안도섭 등이다. 이들은 분단과 6ㆍ25 체험 이후 민족의 격동기인 ‘4ㆍ19’와 ‘5ㆍ16’, 70년대의 어두운 현실, 그리고 80년 ‘광주민중항쟁’ 등에 이르기까지 민족의 역사현실과 시대인식을 바탕으로 현실 모순성과 부조리를 풍자, 알레고리, 상징 등을 통해서 자유민주주의 민중의식을 높였다.(김희수, ‘현대시의 변천’, ≪한국 민족문학과 민족시인론≫, 푸른사상사, 2002)
안도섭 시인은 조선일보와 평화신문의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이후 지금까지 문학단체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간부)나 학계를 멀리하고, 줄곧 창작활동에만 전념해 왔다. 만일 그가 중간에 문학단체나 학계로 적극 진출하였더라면, 그의 작품과 작품세계가 대중과 문학인들 속으로 지금보다는 훨씬 더 깊이 파고들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굳이 그런 데에는 별 미련을 갖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지금까지 문학성 높고 역사성 짙은 작품들을 많이 발표하고 탁월한 저서들까지 상당수 출간했으면서도 언론매체 등을 통해 홍보나 광고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런 연유 때문으로 짐작되기도 하지만 사실상 그의 작품과 작품세계에 대한 연구물은 지금까지 별로 나오지 않은 상태이다. 그러기에 문학도나 평론가들에게는 안도섭 시인의 문학세계에 대한 연구의 여지가 충분할 것으로 보이며, 경우에 따라 더할 수 없이 좋은 연구거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안도섭 시인은 또한 그만의 독특한 서정시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탁월한 서정시인이자, 한용운을 위시한 김영랑ㆍ이육사ㆍ김광섭ㆍ신석정ㆍ윤동주 등과 같은 민족시인으로 평가받는 살아 있는 한국의 대표적 민족시인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르건대, 여기서는 안도섭 시인의 서정시와 민족시 그리고 저항시로 뚜렷이 대별되는 시세계 중 저항시 세계만을 다루었을 뿐이다. 그것도 ≪어느 火刑日≫ 하나만을 집중적으로 살펴본 정도이고, 그나마 그의 시세계의 깊이와 넓이를 충분히 가늠하지 못하여 본 글의 내용이 사실상 피상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음을 밝힌다. 다른 누군가가 관심을 갖고 ≪어느 火刑日≫을 더 심도 있게 분석해 주길 기대해 마지않는다.
서두에서 말한 바도 있지만, 안도섭 시인의 대하서사시를 중심으로 한 여러 작품들에 대한, 특히 그의 저항문학 세계에 관한 연구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보다 다양한 각도로, 보다 적극적으로 진행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물론 그럴 가치가 충분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울러, 안도섭 시인의 많은 작품들에 용해되어 있는, 그 특유의 해학ㆍ풍자성에 대해서도 독특한 연구거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와 관련으로 본 글에서 잠시 다루었던 내용은 그 진정한 넓이와 깊이에 비해 지극히 일부분적이고 초보적인 수준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는 정도의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한편, 문학도ㆍ교수들 중심의 학계 혹은 문인ㆍ문학평론가들 중심의 문예계 등에서 문학관련 연구대상과 주제 등이 시간이 갈수록 빈곤해져 가는 실정이고 보면, 이젠 안도섭 시인의 시세계 쪽으로도 관심을 돌려 연구에 정진해 볼 가치가 있을 것이란 점을 차제에 말하고 싶다. 좋은 연구소스source가 될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 월간 문학21 2005년 7월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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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人百色, 百人同色의 독도 사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