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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소설문단의 신데렐라, 김별아 소설가 * / 안재동
▣ 국내 문학상 사상 최고상금 1억원 고료 ‘세계문학상’의 주인공
2004년 말 국내 문학상 사상 최고상금인 1억원의 ‘세계문학상’을 따내 문단과 언론으로부터의 각광은 물론, 많은 문인들로부터의 부러움과 시샘을 한 몸에 받았던 소설가 김별아.
‘큰 사랑은 공경하기를 신(神)같이 하고 작은 사랑은 희롱하기를 옥같이 하나니, 신라 황제의 여스승으로 신국의 도를 널리 펴 존경을 받은 미실’을 김별아 소설가는 ‘가히 살아 있는 여신’이라고까지 칭했다. 그 늙은 여신이 봄과 함께 이생에서 사라지기 전에 남긴 말이 매우 인상 깊다. “옆구리를 푹 찔리고 뒤통수를 맞으면서야 살아 있었나 혹은 죽어 가나 흐리마리 느낄 뿐, 오직 삶의 즐거움을 맛본 자만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역사 속의 인물을 살려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허구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린다할지라도 엄연히 존재하는 역사의 틀을 작가가 임의대로 해체할 수는 없다. 길고 난다는 소설일지라도 이야기는 엄연히 역사의 그 틀 안에서 돌고 돌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그 여정은 참으로 어렵다. 하지만 기나긴 여정을 뚫고 세상의 빛을 본 소설은 그 자체로 주목을 받게 된다. 김별아의 소설 <미실>도 바로 그런 경우다. 1억원의 상금을 내걸었던 제1회 ‘세계문학상’ 당선작이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사람들은 ‘상금이 많은 문학상 수상작’보다 ‘역사 속에서 걸어 나온 사람’의 이야기라는 점에 더 주목하고 있다.(이지은, 동아일보 기자)
1억원의 복권에 당첨된다는 사실도 무척이나 어렵고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지만, 그 보다 더 어려운 일이 이번 김별아 소설가의 경우와 같이 문학작품 공모에 당선되는 일일 것이다. 복권은 운만 좋으면 누구나 당첨될 수 있지만, 소설 당선은 재능이나 실력 없이는 꿈조차 꿀 수 없기 때문이다.
김별아 소설가는 “저는 5백 원짜리 복권 한 장 당첨된 적이 없는, ‘횡재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갑자기 ‘로또’에 당첨된 것처럼 바라보는 시선도 있어서 몹시 부담스러웠어요.”라고 어느 인터뷰 자리에서 밝힌 적도 있지만, 작가들이 글만 써서 먹고 살기 힘든 것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고 보면, 이런 기회가 더욱 많아져야 하지 않을까.
『미실』(문이당, 2005)은 단행본으로 지난 2월말 경 출간된 이후에도 1억원 공모 당선작이란 명색을 결코 무색케 하지 않을 정도로 서점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조용호 세계일보 기자는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미실』은 4월 말 기준으로 단기(2개월)간에 판매 부수가 10만부를 넘어섰고, 각종 베스트셀러 지표에서 소설 부문 1위를 차지했다. 해외 번역소설이 판치는 출판계와 한국문단에서 『미실』은 새로운 이정표다. 지난해 내내 번역소설 『다빈치 코드』가 국내 소설시장을 장악해 왔다. 이는 한국문학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지만, 그만큼 한국문학이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했기 때문이다. 소설에 대한 독자의 외면은 최근 현상이 아니다. 한국문학 시장은 2000년대 접어들어 꾸준히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작가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다시 작품의 빈곤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현상이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미실』의 부각은 한국문단과 출판계가 흥분할 만한 활력소가 아닐 수 없다. 도서출판 마음산책 정은숙 대표는 “『미실』은 김별아의 기존 작품과 다른 예사롭지 않은 소설로, 여성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변주될 수밖에 없다”며 “여성작가가 역사 속에서 여성을 만났는데 이 필연적이고 아름다운 만남에 독자들이 뜨겁게 반응을 보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세계일보, 2005년 5월 16일)
김별아는 문단에서 ‘여자 마광수’라 불린다. 마 교수의 제자일 뿐 아니라 톡톡 튀는 표현이나 파격적인 묘사, 금기에 대한 도전 등이 마 교수의 그것과 꽤 닮았다. 마 교수가 1992년 음란물 제조혐의로 구속된 후 여러 차례 교도소로 격려 편지를 보내면서 그와 친분을 쌓았다는 김별아는, 그렇지만 자신은 “마광수의 ‘야한 여자’보단 영화 『스캔들』의 ‘숙부인’에 더 가깝다”며 손사래를 친다. 그리고 ‘여자 마광수’라 불리지만 그 역시 아이에게는 그저 평범한 엄마다. 아이가 없는 시간을 이용해 글을 쓰고, 웬만하면 밤을 새우지도 않는다. ‘다음날 살림에 막대한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과천에 사는 그는 동네 아줌마들과 편안하게 티타임을 가진 적도 없고, 서울 외출도 일주일에 한 번 할까 말까할 정도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책이며 자료를 보거나 글을 쓸 짬을 낼 수 없다.[이지은(동아일보 기자), <문단의 ‘여자 마광수’ 김별아>, 신동아 2005.4월호]
과거 김별아 소설가의 첫 번째 창작집이 나왔을 때, 문학평론가 방민호는 그를 두고 ‘1970년 전후 태생의 작가로서는 드물게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라는 방법론적 고민에 충실한 작가’라고 평한 적이 있다. 그리고 “문학을 개인적 유희와 사회적 소비품 차원으로 환원시키지 않으려 한 작가는 언제나 이 물음 앞에 선 자기를 발견할 필요가 있었으니, 김별아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그의 첫 번째 창작집이 보여 주는 넓은 진폭은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라는 하나의 물음 앞에 선 작가의 탐구와 모색의 소산이다.”는 말을 덧붙였는데, 오늘날 그 의미가 매우 커 보인다.
▣ 보수적이라 자처하지만 결코 보수적이지 않은, 가장 여성다운 작가
여성 작가의 글은 ‘여성’의 입장을 떠날 수 없다. 그들이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우선 스스로의 여성됨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김별아 소설가는 최근에 발간된 그의 성찰적 산문집 『식구』(베텔스만, 2005)의 프롤로그에서 “나는 이성애자다.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다. 여전히 처음에 결혼했던 남자와 살고 있으며, 부모와 지속적으로 연락을 하고 있고 명절이면 꼬박꼬박 귀향 행렬에 몸을 싣는다. 이런 면에서 나는 ‘보수’다. 세계를 구성한 기존의 틀에 어김없이 맞추어 살고 있다. 어차피 사람의 의식은 처지와 환경의 규정을 받는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나의 가치와 모랄 역시 ‘보수적’이라는 꼬리표를 떼기 힘들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김별아 소설가는 1969년 강원도 강릉에서 부부 교사인 부모의 1남1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성장했고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사다준 세계명작전집을 읽기 시작한 이래 책벌레가 됐다. 내성적인 성격이라 친구도 많지 않았던 그는 덕분에 책에 더 몰두할 수 있었다.
강릉여자고등학교 시절 문학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진로를 ‘소설가’로 정한 후 지도교사의 도움을 받아 숱하게 책을 읽고 습작을 했다. 학창시절 10년 연속 반장을 한 ‘범생이’였지만 학교 밖에선 17세 때부터 선후배 문학지망생들과 술 마시고 담배 피우며 ‘꽤 놀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창작의 자양분을 키운다는 생각으로 고향에서 두 달간 버스안내양을 하는 등 특이한 경험도 많이 했다.
소설가의 꿈을 버리지 않고 1988년 연세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하지만 연일 최루탄 가스를 마시며 징글징글하게 ‘운동’만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광고회사에 카피라이터로 들어갔는데, 딱 하루 출근하고는 그만두었다. 사무실에 사람들이 획일적으로 앉아 있는 광경이 너무 헛되고 답답해 보였기 때문이다.
1992년에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는데, 대학 재학 중인 1990년에 벌써 제1회 청년심산문학상(대학문학상)에 <봄비>가 당선되기도 했다. 1992년 8월에는 소설집 『신촌 블루스』(죽산)를 출간했다. 그 뒤 1993년 실천문학 봄호에 <닫힌 문 밖의 바람소리>를 발표하면서 정식으로 등단 절차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펴기 시작한다. 장편소설로 『내 마음의 포르노그라피』(답게, 1995/ 이룸, 2001 재출간)를 비롯해, 『개인적 체험』(실천문학사, 1999), 『축구전쟁』(웅진닷컴, 2002) 등을, 소설집으로 『꿈의 부족』(문이당, 2002)을, 산문집으로 『톨스토이처럼 죽고 싶다』(이룸, 2001)와 『식구』(베텔스만, 2005)를 세상에 냈다. 또한 아동문고로 인물이야기집인 『민족을 노래한 작곡가 - 김순남』(사계절, 1994), 『치마폭에 꿈을 그린 신사임당』(창비, 2004), 우리 고전으로 『장화홍련전』(창비, 2003), 청소년 평전 『스크린의 독재자 찰리 채플린』(이룸, 2003) 등을 출간했다.
그렇게 쉴 틈 없이 저작활동을 벌이던 김별아 소설가는 2004년에 들어 그의 작가로서의 삶에 큰 기폭제 역할을 하게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세계일보에서 시행한 제1회 ‘세계문학상’ 1억원 고료 소설현상공모에 장편소설 <미실>이 당선되는 영광을 안은 것이 그것이다. 다음과 같은 그의 당선 소감이 인상 깊다.
남아프리카의 프로테아 나무는 씨앗이 가득 들어 있는 열매를 고스란히 품고서 몇 년이건 하늘을 보며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마른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산불이 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산불의 열기에 의해서만 열매가 터지면서 씨앗을 퍼트릴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벌도 나비도 새도 아닌 마른하늘의 날벼락만을 기다리는 나무의 운명, 그 낯선 고독에 동병상련처럼 가슴이 아팠던 적이 있습니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문학의 운명 또한 그처럼 우연 같은 필연에 의지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열일곱 살에 문학을 하며 살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한 이후, 한 번도 그를 떠나 지낸 적이 없습니다. 문학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곧 삶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이었고, 어떤 문학을 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깊고 은밀한 고민이었습니다.
작가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지 어느새 십 년이 지나버렸습니다. 내게 주어진 업을 마땅히 내가 감당하리라는 각오로 버텨온 시간이지만, 언제나 한결같이 즐겁고 행복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아무리 해도 숙련되지 않는 고단한 노동, 안 쓰면 영영 못 쓸 것만 같은 불안 속에서 뒤척여야 했습니다.
아름답지만 위험한 미실을 사랑하는 외골수의 사내들처럼, 때로 야속하고, 내 몫이 아니려나, 차라리 놓아버리는 게 내가 사는 길이 아닐까 고민하기도 했지만, 그건 이미 내 의지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문학은 내게 무언가를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였기에, 문학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믿지 못할지언정 나는 오로지 문학으로 구원받고 싶었습니다.
사랑을 영원하게 하는 것은 열정과 확신이라지요. 이미 저보다 앞서 사랑에 미쳤던 분들이 그 열정과 확신의 빛깔이 어떠하여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천오백 년 전의 여인 ‘미실’을 따라 좇으며 역사책을 뒤적이는 동안, 보상을 바라지 않는 열정과 확신으로 평생을 바친 많은 스승들을 만났습니다. 제국의 서고에서 ‘화랑세기’를 필사하며 우리 역사를 후대에 남기고자 했던 남당 박창화 선생, 개발 이데올로기에 밀려 처참하게 훼손되는 우리 문화를 보존하고자 악전고투했던 마지막 신라인 고청 윤경렬 선생 등의 족적은 영원이란 결국 영원을 믿는 사람들만이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날로 ‘산업’이 될 수 없는 문화가 퇴행해가는 척박한 현실에서 문학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는 큰 상을 만들어주신 세계일보 관계자들, 행운에 익숙하지 않아 당황해하는 저보다 훨씬 더 저의 행운에 기뻐해주신 많은 분들, 상금이 너무 커서 좀 배가 아프다고 질투가 난다고 솔직하게 말해주신 분들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제 졸작이 질투를 불러일으킬 만하다면 진심으로 기쁘겠습니다. 동료 작가들의 순정한 질투만이 한국문학을 살리는 길이리라 믿습니다.
오늘까지만 제게 주어진 영광에 기꺼이 기뻐하고, 내일부터는 다시 스스로를 불신하고 세상에 불화하는 숙명에 몸을 맡기고자 합니다. 오로지 내 앞에 주어진 시간의 길을 따라 미련스레 가고자 합니다. 이번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다른 무엇도 아닌 소설가로 살기를 희망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1억원이나 되는 ‘엄청난’(한국 문단의 원고료 지급 현실에 비추어) 상금을 받은 작품에 걸맞게, 『미실』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김별아 소설가의 작품 의도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미실은 어머니로서, 한 여자로서도 어느 한쪽 꿇리지 않고 당당한 인물이었어요. 요녀와 성녀의 이미지를 한 몸에 끌어안고 살았던. ‘모성’과 ‘욕망’이 충돌하지 않고 한 인물 속에서 용해된 여성 캐릭터를 구현해 보고 싶었죠. 남성 작가들의 소설에서는 여주인공이 늘 모성과 욕망의 어느 한쪽 이미지로만 치우치는데, 그 극단적 묘사법은 옳지 않다고 느꼈습니다.”고 밝혔던 대목을 우리는 특별히 기억해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남궁산 판화가는 김별아 소설가에 대한 이미지를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분위기 메이커이다. 출판모임 등의 뒤풀이에서 내 또래들이 발라드처럼 처지는 노래로 분위기를 가라앉히면 그는 단숨에 격렬한 춤과 노래로 주변의 분위기를 확 띄운다. 그의 말은 거침이 없지만 뒤탈이 없다. 나는 그런 김별아를 바라보는 일이 즐겁다. 그는 자신의 장서표에 ‘붕새’를 새겨 달라고 했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마음껏 누리는 위대한 존재이며 단번에 구만 리를 난다고 하니 부럽다나. 그러나 그도 나도 붕새를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날 밤 꿈에 붕새를 보았다. 꼭 이렇게 생겼더라.”(남궁산 판화가)
오늘날 다시 온 천하가 주목하는, 과거 신라시대의 여걸(女傑) ‘미실’의 가장 핵심적인 모습은 바로 ‘자기 운명에 굴하지 않은 주체적 여성’이란 점인데, 어쩌면 김별아 소설가 자신의 성격과 매우 흡사하지 않을까 한다. 자신의 성격을 묘사하듯 ‘미실’을 생생하게 그려냈을 것이란 상상은 아마 누구에게나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 테니까.
이제 한국 소설문단의 ‘신데렐라’가 된 김별아 소설가의 성품은 또 어떠한지에 대해서도 몹시 궁금하다. 그래서 그가 지난해 어느 날 동아일보에 발표했던 시론 하나를 살펴본다. 진솔한 그의 글 속에서 묻어나는 그의 심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게는 한때 같은 꿈을 꾸었던 친구들과 만든 인터넷 커뮤니티가 있다. 얼마 전 그곳에 ‘외국인(?)이 잠깐 다녀 볼 수 있는 곳을 추천해 달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 왔다. 외국인이면 외국인이지 괄호 안의 물음표는 또 뭔가. 내용인즉 한 친구가 해외입양아 모국방문 프로그램에 참가해 3일간 ‘홈스테이’를 제공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소개받은 덴마크 국적의 학생들에게 한국을 실감나게 알려 줄 아이디어를 달라는 것이었다.
서울 남대문시장 쇼핑, 국립국악원 상설국악공연 관람, 인사동 막걸리 파티…. 나름대로의 조언들이 난무한 끝에 친구는 소시민이 사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 주고 싶다며 자신의 일상과 비슷한 일정을 준비했다고 했다. 그들에게 되도록 긍정적인 추억을 많이 남겨 주고픈 욕심도 있지만 조국이 한때 자신을 버렸다는 원망을 조금이나마 희석시킬 수 있을지, 홈스테이 날짜가 다가올수록 밤잠을 설칠 정도로 걱정이라 했다.
해외입양아. 우리 사회에서 그에 대해 말하는 일은 불편하다. 그들은 때로 우리보다 더 토종의 순박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외국인 아닌 외국인이다. ‘생물학적 부모’를 찾기 위해 스무 시간 이상을 비행해 와 닮은꼴의 가족을 찾아 내고도 막상 눈물 말고는 소통할 방법이 없어 서로 부둥켜안고 쩔쩔 매는 낯선 존재다. 미안하고 부끄러워 반갑고 기쁘다는 표현조차 제대로 할 수 없다. 그러한 채로 50년이 흘렀다 한다. 그래서 한국인의 해외 입양 50년을 기념하는 2004 세계한인입양대회의 개최 소식을 듣는 일은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넘어서 슬프고 저리다.
간신히 가족 상봉에 성공하면 나이보다 훨씬 늙어 버린 어머니들은 하나같이 펑펑 울며 ‘미안하다’고 말한다. ‘보고싶었다’도 아니고 ‘잊지 않았다’, ‘사랑한다’도 아니다. 새끼를 지켜 내지 못한 어미는 미안할 수밖에 없다. 가난과 불운, 피치 못할 숱한 사정들을 변명할 도리도 없이 그저 약하고 못나서 새끼를 잃어야 했던 스스로를 원망의 표적으로 던진다. 하지만 정말 그뿐인가. ‘모국’, 어머니 나라라는 비유는 국가에 충성 맹세를 바치라고 할 때만 유효한 것이 아니다. 국가는 개별자인 국민의 부모 역할을 해야 한다. 가족 단위에 개인을 보호할 책임을 모두 떠맡긴 채 여전히 뒷짐을 지고 사후약방문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는 무능하고 비정한 모국을 생각하면 고아의 심정처럼 외롭고 두려워진다.
새삼스러운 민족주의가 아니더라도 한민족은 대단한 민족이다. 규모 면에서 중국 이스라엘 인도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 4, 5위의 해외 교민 수를 자랑한다는데 우리 해외 교민들은 철저히 국가의 정책이 아닌 개인의 의지로 온갖 난관을 이겨냈다. 1960년대 이후 자유 이민이 시작되어 지금은 홈쇼핑에서 이민상품을 파는 시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빚과 숙제는 남아 있다. 중국 러시아 등지의 항일독립운동가, 미국(하와이)과 남미의 초기 농업 이주자, 중앙아시아의 강제 이주자, 일본군 위안부, 학도병 징병 등으로 강제동원된 재일교포의 역사는 고스란히 우리의 민족 수난사다. 역사를 잊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그 자명한 교훈은 지금 우리가 해외교민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가야 할지 중요한 지침이 될 것이다.
친구는 작은 집의 안방을 내어 주고 마루에서 불편한 잠을 자면서도 즐거웠다고 한다. 새벽에 함께 동네 뒷산을 올라 약수를 마시고 소망탑에서 기도도 했다. ‘손님’들은 헤어짐이 서운해 맥주를 한 잔 사고 싶다고 했는데 자기들끼리 돈을 모아 2000cc에 해당하는 20200원을 건네주더라고 했다. 그래서 안주는 친구가 샀단다. 관계는 새롭게 시작되었다. 소통을 통해 더 넓고 깊게, 우리는 만나야 하고 세계는 확대되어야만 한다.(김별아, ‘시론-반갑구나, 부끄럽구나’, 동아일보, 2004.08.02)
‘여성이란 강한 존재’라는 김별아 소설가의 여성관 김별아 소설가는 각종 매체를 통하여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의 여성론을 직․간접적으로 펼치곤 하는데, 수년 전 한겨레신문에 ‘강한 여성’이란 주제로 기고한 칼럼이 눈길을 끈다.
여자들이 운다. 여자의 눈물이 빠진 통속이란 없는 법이다. 브라운관에서도 울고, 스크린에서도 울고, 현실에서도 어김없이 운다. 그런데 예전과 달리 요즘 여자들은 단순히 `여자이기 때문에' 울지 않는다. 사랑의 상실과 배신 때문에, 혹은 가치 없는 상대에게 너무 쉽게 바친 헌신 때문에 나약한 자신이 먼저 울어버리는 것만은 아니다. 그들의 눈물에도 이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권력 때문에 울고, 복수를 다짐하며 울고, 국운의 쇠퇴를 탄식하며 울고, 자기를 온전히 받아줄 수 없는 세상을 향해서도 운다. 울며 소리친다. 내 몫을 내놓으라고, 내 존재를 함부로 부인하지 말라고, 내 엄연한 욕망을 인정하라고!
그들을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웃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상식을 가진 다수가 미루어 짐작하여 마땅한, 바로 그 결말이 어긋나는 순간에 온다. 남자보다 힘센 여자, 미욱한 남자를 깨우쳐 주는 여자, 남자가 모르는 본질을 아는 여자, 남자보다 더 깊게 생각하고 한 발 앞서 행동하는 여자, 그걸 실제로 현실에서 기대하는 이는 별로 없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래도 당장은 통쾌하다. 만날 운명이니 팔자니 하는 것에 끌려 다니며 질질 짜는 꼴을 보느니 치가 떨리도록 요사스럽고, 철제 로봇처럼 뻣뻣하고, 무식 불한당으로 막 나가는 여자들을 보는 게 낫다. 그렇다. 대리만족이다. 착각이고, 환상이고, 또 한 번의 곡해다.
하지만 너무 많은 착각도, 환상도, 감정이입도 정신건강에 해롭다. 그들 중 누구도 우리를 진짜로 `강하게' 만들어 줄 생각은 없다. 그들은 여전히 부박한 현실 속에서 맨땅에 헤딩을 하듯 생존에 안간힘을 쓰는 다수의 진짜 `여성'들에게 손짓하지 않는다.
매력적인 요녀를 원하는가, 철의 여인을 원하는가? 그도 아니면 막강한 카리스마로 남자를 자빠뜨리고 세상을 콱 밟아 눌러줄 여자 보스를 원하는가? 하지만 정작 그들이 빚어낸 `강한 여성'의 이미지에 추파를 받는 건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엄연한 현실의 여성들이 아니라, 한밤의 파티를 위해 이브닝드레스에 최신형 리모콘 귀고리를 달고 오늘도 사뿐사뿐 밤마실을 준비하는 우리 시대 최고의 CF 여성스타와 닮은, 적어도 그처럼 홀린 듯 거침없이 지갑을 여는 준비된 소비의 주체들이 아닌가. 인터넷 유머에서는 그렇게 사는 것을 지극히 평범하며 현대적이라고 생각하는 광고 속 그를 위해 있지도 않은 아버지가 등장해 중얼거린다. “저년, 저, 저년 좀 봐라! 또 카드 긁으러 나간다!”(김별아, 한겨레신문, 2001년 11월 12일)
김별아 소설가의 성찰적 산문집 『식구』에서도 그 특유의 여성관이 물씬 배어 있다.
‘당신에게 가족은 상처입니까? 구원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져 놓고, 너무 오래 묻어두었기에 너무 오래 앓아왔다는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풀어간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큰 위로가 되는 이름, 바로 ‘식구’, ‘가족’이 아닐까. 가장 가까운 사이면서도 서로를 깊이 감싸주지 못했던 사람들. 그들의 모습을 소설가 김별아는 딸로서,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엄마로서 들려준다. 살아가는 경험과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 사회적·문화적 여러 현상들을 책으로 엮었다. 오랫동안 묻어왔기에 너무 오래 앓아 왔다고, 그래서 이제는 터놓고 얘기하고 싶다고 말하는 김별아 소설가는 이 ‘식구’라는 책에서 때론 통렬하고 뜨겁게 때론 냉정하게 이야기한다.
누구도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구원이자 상처인 가족, 나를 꼭 닮은 낯선 타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김별아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이상한’ 이 사람들을 이해하고 보듬어 안으면서 동시에 틀에 얽매이지 않는 길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주변의 다양한 모습들의 가족(편부모 가정, 동성애 커플, 입양 가족, 재혼 가족, 공동체 가족 등)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그들을 인정하고 함께 고민해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작가로서의 삶뿐만이 아니라 평범한 30대 주부의 삶을 진솔하게 보여주고 있는 이 책은 미혼 여성들에게는 좋은 정보가, 기혼 여성들에게는 자기 성찰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행복한 가족’ 이면에 감춰진 위기와 해체, 여성들의 잃어버린 정체성에 대한 고민들이 때론 폭포처럼 때론 고요한 시내처럼 흘러내려 우리의 마음을 적시고 세상을 적신다. 그리고 그 고민의 끝에서 김별아 소설가는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결국 ‘사랑’이었노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 신라 황실을 주물렀던 여걸(女傑) ‘미실’을 현세에 불러내다
제1회 ‘세계문학상’ 당선 발표와 동시 세인들의 주목을 한꺼번에 받았고 2005년 3월초 출간 이래 6월 현재까지 베스트셀러 10위권을 줄곧 지키는 소설 ‘미실’. 역시 10위권을 유지하는, 사형수와 한 여인의 만남을 소재로 한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작가 공지영과 함께 한국 소설이 전반적으로 부진한 가운데 한국 소설의 자존심을 외롭게 지켜가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강적 줄거리와 주요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다.
법흥제를 모신 옥진은 칠색조가 품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본남편인 영실공과 합하여 딸 묘도를 낳는다. 묘도는 옥진이 임신하여 딸을 낳는다면 빈으로 삼을 것이라는 황제와의 약속에 의해 법흥제를 색으로 모시나, 우람한 법흥제를 능히 받아들이지 못하여 사랑을 받지 못한다. 이리하여 눈물로 날을 지새우던 묘도는 미남자 미진부와 서로 통하여 미실을 임신하게 되고, 마침내 옥진의 도움으로 황제의 허락을 얻어 부부의 연을 맺는다. 옥진은 미실을 지극히 아껴 온갖 미태술과 기예, 그리고 글을 가르친다. 옥진과 벽화와 오도의 세 가지 아름다움을 한 몸에 모았다고 소문난 미실은 자기의 운명을 눈치 채지 못한 채 아름다운 소녀로 자라난다.
아름다운 소녀로 자란 미실은 짝을 찾던 지소태후의 아들 세종의 눈에 띄어 입궁하지만, 곧 지소태후와 사도왕후의 권력 다툼 과정에 휘말려 궁 밖으로 내쳐진다.
자신을 둘러싼 잔인한 운명을 깨달은 미실은 화랑 사다함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 부귀영화보다 진정한 사랑을 쫓기로 결심하지만, 사다함이 가야 정벌에 출정한 직후 세종이 상사병으로 죽게 생겼으니 다시 입궁하라는 지소태후의 명을 받고 만다. 미실은 사랑을 빼앗긴 후 권력에 휘둘리기보다는 스스로 권력이 되고자 하는 의지와 욕망에 충천하여 냉혹한 여인으로 변모한다. 미실은 동륜태자와 미리 사통하여 후일을 도모하자는 사도왕후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동륜태자의 아이를 임신한 채로 진흥제의 눈에 띄어 색을 바치는 신하로서의 본래 임무를 다하게 된다. 그러나 황제의 지극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옥진의 죽음을 겪은 후 있는 그대로의 본능을 인정하여 더욱 과감한 음행에 취하게 된 미실은 사다함의 동모제인 설원과 동생 미생에까지 손을 뻗게 된다. 그리고 설원과 미생의 도움으로 마침내 바라던 원화의 위에 오른다. 그 무렵 미생과 함께 난봉을 벌이던 동륜태자가 진흥제의 후궁인 보명의 궁에 숨어들었다가 큰 개에 물려 죽는 사건이 벌어지자, 미실은 자신이 위험해지리라는 것을 깨닫고 원화에서 물러나 출궁한다. 하지만 진흥제는 그리워하는 마음을 억제하지 못해 결국 미실을 다시 불러들인다. 진흥제가 풍질에 걸려 내외 정사를 보지 못하자 사도왕후와 미실이 권한을 대신하고, 진흥제가 세상을 떠나자 미실은 사도황후 등과 함께 음모를 꾸미어 황제의 죽음을 숨기고 먼저 태자와 통하여 다른 마음을 갖지 않기로 약속한 후 금륜태자를 왕위에 오르게 한다. 하지만 진지왕이 된 금륜태자가 미실에게 불복하고 다른 여인을 탐하니, 미실 일파는 진지왕을 폐위시키고 유궁에 유폐한다. 그리고 진평제가 즉위한 후 마침내 삼조(진흥, 진지, 진평)를 차례로 섬긴 미실은 정사를 운영하며 화랑도에 깊이 관여한다. 미실은 늙어 영흥사로 떠나고, 함께 따라간 설원은 미실이 병에 걸리자 그 병을 자기가 받겠노라고 기도하여 마침내 미실을 살리고 대신 죽는다. 사랑으로 천하를 얻은 신라 여인, 미실도 곧 설원을 따라 세상을 떠난다.
그런데, 과연 어떤 요인 때문에 <미실>이 1억원의 상금을 받게 되었을까? 한달이란 오랜 기간 동안 치열한 심사과정을 거쳤다는 작품심사평도 매우 궁금해진다. 다음은 심사위원들의 심사평이다.
■ 원로들의 평
최종심에서 논의의 대상이 된 작품은 김이누의 ‘몽이의 블루헤어에 갇힌 새’와 금현의 ‘이봐, 바람개비가 돌고 있잖아’, 그리고 김별아의 ‘미실’ 세 편이었다. 가독성이 뛰어난 것은 ‘몽이의 블루헤어에 갇힌 새’였다.
존재론적 정체성을 잃고 무국적자로 위태롭게 살다가 파멸에 이르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고백체로 담아내고 있는 ‘몽이의 블루헤어에 갇힌 새’는 잘 읽힐 뿐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기능적으로 얽어짠 솜씨가 좋았으나 지나치게 고양된 영탄조의 문체, 생모의 갑작스러운 출현 등이 보여주는 작위성, 붉은 단추의 상징화 미숙, 결말의 안이성 등이 지적되어 당선권에서 제외됐다.
남은 두 작품 ‘이봐, 바람개비가 돌고 있잖아’와 ‘미실’은 여러 면에서 대조적인 소설 문법을 보여주고 있어 장시간 토론이 이어졌다.
‘이봐…’는 짧고 세련된 문체와 현실·가상 공간을 넘나들다가 점층적으로 결말에 이르는 모던한 소설 기법 등은 좋았으나 전반적으로 서사의 볼륨이 빈약하다는 점과 지나치게 대화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 주제의식이 불분명하여 공소하게 느껴진다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됐다.
‘미실’은 그와 달리 ‘화랑세기’에 기록된 역사 속 인물을 독특하고 뚜렷한 새로운 유형의 캐릭터로 진지하게 형상화해냈다는 점에서 호감을 샀다. 물론 역사의 기록을 소설적 상황으로 재구성해내는 데 필연적으로 따르는 창조적인 관점이 미흡하다든가,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서술 때문에 로맨스적 구조에 가깝다든가, 결말부에서 상투적인 계몽성을 드러냈다든가 하는 점들이 지적됐으나, 작가의 탐구심이 돋보이는 문장과 호방하게 밀고 나가는 서사력과 새로운 유형의 캐릭터를 응축해놓은 솜씨 등에 비해서는 부분적인 결함이라는 데 심사위원들의 견해가 대부분 일치했다. 무엇보다 신라의 여인 ‘미실’을 왜 오늘의 우리가 다시 만나야 하는지, 작가가 명백한 대답을 갖고 있는 듯 보여 마음 든든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스타작가’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내면화 경향이라고 요약되는 1990년대식 협소한 소설 문법을 밀어내면서 호방하고 장대한 서사를 담아내는 로맨스적 구조의 소설들이 최근 다투어 등장하고 있다. ‘미실’은 그런 상황에서 선도적 역할을 능히 감당해내리라고 믿는다. 새로운 서사의 시대가 열리기를 바란다.(김윤식, 김원일, 박범신)
■ 소장들의 평
본심에 오른 세 편의 작품 중 ‘몽이의 블루 헤어에 갇힌 새’는 스토리 텔링 면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힌 작품이다. 그러나 보다 명료하게 형상화되어야 할 인물의 개성, 장편 분량에 걸맞은 서사, 제대로 된 한판 갈등 등이 확보되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불필요하게 냉소적인 말투와 화자인 18세 소녀의 언행으로 볼 수 없는 대목이 자주 드러나는 점도 거슬렸다.
‘이봐, 바람개비가 돌고 있잖아’는 오랜 연마 과정을 거쳐 뽑아낸 정제된 형태의 작품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문체의 개성이 확보되어 있고 지문이나 대사의 재기발랄함도 눈길을 끌었다. 그럼에도 언젠가 어디선가 만난 듯한 상투성, 설익은 사유의 아마추어리즘 등이 독서를 방해하곤 했다. 무엇보다도 단편 규모의 빈약한 서사를 너무 큰 그릇에 담은 듯 허전한 뒷맛이 남는다.
‘미실’은 장편이라는 장르적 규범에 가장 충실하며 또한 프로페셔널한 작품이다. 쓰고자 하는 대상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점, 역사 소설을 쓸 때 필요한 기초 지식을 잘 확보하고 있는 점, 역사적 사실 위에서 펼치는 상상력의 전개가 거침없다는 점, 장편에 걸맞은 서사의 부피를 확보하고 있는 점, 그 모든 것을 이끌어 나가는 문체의 숙련성 등이 두루 믿을 만했다. 특히 이 소설의 매력은 신라 여인 ‘미실’을 통해 그동안 예술 영역에서 만나지 못했던 새로운 여성을 그려냈다는 점이다.
‘미실’은 데미테르 같은 모성의 여성도 아니고, 팜 파탈인 치명적 매혹의 여성도 아니다. 남성에게 의존하거나 남성의 성적 대상으로 존재하는 여성 또한 아니다. ‘미실’은 여성을 통제하는 제도가 만들어지기 전, 성 모럴이 정립되기 전, 남녀가 가장 자연스러운 생물학적 인간으로 존재하던 시기의 여성이며 이 소설은 그런 여성을 잘 형상화하고 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역사적 사실에 지나치게 충실해 구성의 묘를 발휘하지 못한 점, 역사 지식을 되도록 많이 담으려는 욕심 때문에 불필요한 의고적 표현이 눈에 띈다는 점이다.(성석제, 하응백, 김형경, 서영채, 김미현, 김연수)
▣ 미실은 1억 상금이 아깝지 않은 작품, “반갑고 고맙다”
제1회 ‘세계문학상’ 당선작 『미실』에 대한 독자들과 출판계의 반응을 한마디로 압축한 말이다. ‘반갑다’는 말은 읽을 만한 한국소설이 드물었던 현실에서 독자들이 보이는 반응이고, ‘고맙다’는 말은 초토화되다시피 한 한국문학 시장에 활력을 주어서 그렇다는 문단과 출판계의 찬사이다. 인터넷 서점의 독자 서평란에 올라온 글들을 보면 ‘미실’에 대한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대표적인 인터넷서점 중의 하나인 ‘인터파크’에는 무려 400개가 넘는 독자들의 댓글이 올라와 있다.
“과연 제1회 ‘세계문학상’ 수상작이며 1억 원이라는 거액의 상금을 받은 화제의 작품이라는 데 부끄럽지 않은 작품”(서혜주·인터파크), “대한민국 여성이라면 꼭 읽어볼 만한 책”(김태연·인터파크), “너무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고 상상력도 풍부해지고 너무 좋다. 그리고 너무 흥미롭다”(심은옥·인터파크), “최근에 가장 나에게 감동을 준 책…. 대학에서 여성학 강의할 때 학생들과 여성의 성적 주체에 대해 이야기하다 설득력을 더하기 위해 선택”(unsa1020·교보문고), “여성의 힘을 보다…. 이 소설에 대한 칭찬이 자자하다. 사실 역사물을 좋아하는 나의 취향도 있지만 이 소설은 색다른 감흥을 주었다”(어울림·yes24)라는 등의 다양한 의견들이 그것이다.
출판평론가 한기호씨는 “한국문학이 폐허가 되다시피 한 시장 상황을 극복하려면 작가들이 최대한 겸손한 자세로 철저한 자기검증을 통해 거듭나야만 한다”며, “김별아의 이번 작품은 그러한 면에서 모범을 보여준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문화일보의 최현미 기자는 ‘미실’에 대한 각계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소설 ‘칼의 노래’의 이순신에서 볼 수 있듯이 남성 영웅들은 집단주의, 영웅주의, 공적 관계에 의지했던 오랜 관례를 깨고, 공적관계보다는 사적관계 혹은 내면의 이야기로 들어가고 있다. 이에 비해 황진이, 미실의 경우 육체, 몸이라는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서 출발하지만 개인의 내면, 개인의 관계를 넘어 집단적 관계로 나가고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장은수씨는 “결국 여성의 사회적 지위향상이라는 시대 변화 속에서 여성의 신장된 에너지를 감당해낼 수 있는 영웅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해 남성중심의 역사의 지배자를 바꾸려 한다. 이 역시 남성 중심적 역사라는 집단적 기억을 재조정하는 작업”이라며 “오랫동안 우리 역사 속 여성들은 남성적 시각에 의해 만들어진 인물들이었고, 그나마 몇몇에 불과했다. 현모양처 신사임당, 예인 황진이, 요부 어우동 정도. 이제 여성작가에 의해 새로운 여성이야기는 나올 수밖에 없고, 앞으로도 더 많이 나 올 것”이라고 진단했다.(문화일보 2005년 3월 22일)
▣ 철학서에 가까운 스포츠 소설집, 『축구전쟁』을 내다
『축구전쟁』은 축구를 통해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성장 소설이라 볼 수 있는데, 그러나 이 작품에서 ‘축구’는 단순히 소재 차원에 머무르고 있지 않으며, 삶 그 자체로서의 의미를 획득한다. 제2의 펠레를 꿈꾸는 온두라스의 가난뱅이 소년 ‘뻬뻬’와 인생의 지혜를 터득한 늙은 ‘인디오 나꼼’, 이들을 둘러싼 슬픈 현실을 통해서….
김별아 소설가는 『축구전쟁』 저작을 2002년 우리 땅에서 열린 월드컵을 축하하며 기념하고 싶다는 소박한 마음에서 시작했는데, 2002 월드컵 D-100일 날 책이 출간됐다.
1969년에 있었던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간의 축구전쟁을 배경으로 삼다 보니, 필연적으로 라틴 아메리카의 슬픈 역사와 인간주의적인 마야 문명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저자는 이를 두고 ‘가볍게 떠난 산책길에 난데없는 험난한 등반을 하게 된 형국’이라 말하고 있지만, 그렇기에 새롭고도 매력적인 작품 하나를 낳은 게 아닐까 싶다.
김별아 소설가가 『축구전쟁』의 말미에 직접 남겨둔 다음과 같은 말이 주목된다.
애초에 ‘축구 소설’을 구상할 즈음에는, 생일 선물용으로 주인공의 이름이 들어갈 부분에 아이의 이름을 넣은 동화책을 준비하는 정도의 기분이었다. 우리 땅에서 열리는 최대의 스포츠 제전 월드컵을 나름대로 축하하며 기념하고 싶다는 소박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막상 배경이 되는 1969년 온두라스-엘살바도르 축구 전쟁의 주변 상황을 취재하다보니, 필연적으로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적 상황과 마야 문명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의 열정과 턱없는 자신감은 잠을 설치게 할 만큼의 부담감으로 변했다. 가볍게 떠난 산책길에 난데없는 험난한 등반을 하게 된 형국이었다.
축구라는 스포츠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데는 본질적으로 어려움이 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골을 넣기 위해 구십 분 동안 꼬박 공을 차며 달리는 지극히 단순한 행위를 극적으로 표현하기에 언어는 너무도 평면적인 도구이고, 공이 선수의 발을 떠나 공중을 날아 골키퍼의 손을 피해 그물을 뒤흔들 때까지 절정의 속도감은 경기장에서 함께 흔들리며 느끼는 감동 속에서만 생생히 살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나는 힘겹지만 즐거웠다. 어쩌면 축구라는 스포츠에 대한 호감이나 열광도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일 수 있다. 타인에게 나의 취향에 대한 공감을 호소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다른 문명의 역사를 이해하는 일 역시 내게 소중하고 긴요했다. 치열하고 격렬한 경기 속에 선수와 관중이 한 덩어리가 되고, 멋진 승부를 다퉜던 상대 팀에게마저 미미한 동질감과 애정을 느끼는 것처럼, 나는 이전까지 그 지리적 위치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온두라스라는 나라의 가난하고 꿈 많은 소년을 통해 새로운 고통과 열정을 배웠다.
왜 축구를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유를 설명하는 대신 경기장에 가 축구를 직접 즐겨보라고 말할 것이다. 내게 축구는 곧 가치의 스포츠이다. 아름답고 창조적인 경기를 펼치는 팀 혹은 국가는 자신들이 추구하는 아름다움과 창조성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역사 속에서 아름답고 창조적이었던 전통과 기억을 만방에 과시하는 것이다. 비난과 냉소보다는 지지와 격려를, 우리가 기꺼이 못난 스스로를 껴안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가의 말을 쓰다보면 언제나 구차한 변명을 하는 기분이다. 내가 소설로 못다한 이야기는 경기장에 있다. 마음껏 그것을 즐기고 취하시길 바라마지 않는다.(김별아)
한편, 고영직 문학평론가는 장편소설『축구전쟁』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축구전쟁』은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라는 지리공간을 무대로 하여 한국문학의 외부(성)을 성찰한 소중한 사례로서 기록된다. 이들 작품은 90년대 초반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 로드로망(road-roman)류의 소설과는 달리, 작품의 배경은 물론 주인공까지 현지인들을 등장시킴으로써 타자성(the Other)에 대한 독특한 성찰로 안내한다. 스스로 ‘축구광’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 『축구전쟁』은 12살 온두라스 소년 ‘뻬뻬’의 성장기를 통해 라틴아메리카의 고독을 담담히 적고 있는 작품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구절들은 일종의 인생론이라고 부를 만하다.
“펠레처럼 훌륭한 선수를 예외로 삼는다 해도, 보통 선수들은 고작해야 삼사 분 정도 공을 지닐 수 있지. (중략) 이를테면 팔십칠 분의 고독, 팔십육 분의 고독을 제대로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거야.”(고영직/문학평론가, 소설가 김별아를 만나다-제2의 데뷔 준비하는 ‘꿈의 부족장’, 경기문화재단 웹진 2004년 7․8월호)
그런데, 장편소설 『축구전쟁』은 단순한 축구라는 스포츠에 대한 사람들의 열광적인 분위기와 실제만이 느껴지진 않는다. 소설 『축구전쟁』은 마치 한 편의 서사시집을 연상케 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매 장의 첫머리는 축구라는 스포츠 이미지를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한 편의 긴 사유적 서사시 또는 철학서의 한 대목처럼 차분하고 깊은 생각에 잠기도록 한다.
1
태초에 텅 비어, 오로지 아득한 어둠뿐이었다. 밤은 이울어 다시 밤으로 이어졌고, 겹겹이 쌓인 무겁고 두터운 암흑 속에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것들만이 요요히 펄럭이며 존재하였다. 공허와 추위에 떨던 외로운 신들은 무겁게 드리운 암흑의 휘장을 거둬줄 어떤 것을 간절히 원했다. 그들은 끝없는 밤 한가운데 홀연히 모여들어, 비로소 세상에 무언가 다른 것이 필요하다는 데 합의했다. 찬란하고 가벼우며 부드럽고 따뜻한 무엇, 그들은 그것을 ‘빛’이라 부르기로 했다.
2
우기가 끝날 무렵 세상은 온통 질퍽하였다. 물의 신 칙찬이 내려준 비가 저수지를 채우고, 감자와 옥수수 밭을 적시고, 꼬마야겔라 외곽 주택지의 빈민 가옥 몇 채의 지붕을 어김없이 허물었다. 골목길은 텅 비어 흔한 노새 한 마리 서성이지 않았고, 물이 불어 콸콸 넘치는 천변에는 물푸레나무와 갈대 틈새로 키를 돋운 잡초들만이 무성했다. 뽀얀 물안개는 게으른 정령의 손가락처럼 이곳저곳을 한적하게 훑고 다녔다. 후끈한 공기에서는 감고 덜 말린 머리카락을 들출 때처럼 습한 냄새가 났다.
3
사람들은 백색 별에 살았다. 검고, 희고, 노란, 때로 검붉고 회백색 빛깔의 피부를 갖고 있던 그들은, 실상 그들의 별이 검은지 흰지 노란지, 발광을 하는 불꽃 같은지 창백한 잿더미 같은지 알지 못했다. 아무도 그 별을 떠나 그 별의 빛깔을 바라본 자가 없었다. 그들이 백색 별에 갇혀 살았던 그때까지 그러했다.
김별아의 자기성찰적 에세이집, ‘톨스토이처럼 죽고 싶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던 바대로 김별아 소설가는 ‘분위기 메이커’로서의 이미지와는 아주 거리가 느껴지는 『톨스토이처럼 죽고 싶다』(이룸, 2001)란 산문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김별아 그만의 또 다른 지적 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한다.
김별아 소설가는 69년생, 닭띠니까 우리나이로 올해 서른일곱이다. 아이가 있는 아줌마라지만, 연령 기준으로 아직은 젊은 작가라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톨스토이처럼 죽고 싶다’, 다시 말하면, 어떻든 ‘죽고 싶다’는 산문집을 펴낸 것이다. 사실 ‘죽고 싶다’는 아무나 아무 때나 하는 말이 아니지 않는가. 어느 개인이 정말 심각할 때 하는 말이다. 그런데 그가 감히 그 말을 한 것이다. 더군다나, 아예 책 제목에다 버젓이…. 따라서 그 내용은 책을 읽기 전까진 다분히 철학적이고 사유적일 것으로 짐작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 책은 짐작대로 삶이 내내 지겹다거나, 힘겹다고 징징대는 내용이 분명 아니다. 일상에 대한 소감은 사실 애정이 가득하다. 때로 내뱉는 도발적인 문제제기나 투덜거림도 이런 애정에 솔직함이 더해져 나온다.
어쩌면, 김별아 소설가가 과거 동아일보 지면에 발표한 바 있는 다음과 같은 칼럼도 이 책의 저술 배경과 무관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인간은 결국 추억을 먹고 산다지만, 쉽사리 추억의 감상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나는 아직 젊거나 어린 모양이다. 살아 다시 만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추억이란 말을 쓰지 않겠다. 끊긴 연락은 언제고 닿을 수 있고, 재회를 위해 할애할 시간은 여전히 많이 남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영원 속으로 이미 사라진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은 어쩔 수 없다.
학교를 마치고 결혼하기 전이었으니, 아마도 92년 겨울이었을 게다. 서울 광화문의 어느 건물 추운 강당에서 민족문학작가회의 정기총회가 열렸다. 어쩌다 그곳에 그들 모두가 모여들었는지, 그러다 어떻게 약속이라도 한 듯 차례차례로 심연 속으로 사라져간 것인지 돌이켜 보면 기가 막히고 마음이 저리다.
남민전의 전사 김남주 시인이 자신은 고자라서 연애도 못 한다고 의뭉스럽게 농을 한다. 스물네 살의 철모르쟁이인 나는 정말이냐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다. 밀양에서 상경한 이재금 시인이 두툼한 ‘밀양문학’지를 안겨주며 소외된 지역문학의 현실을 개탄한다.
나는 입을 야무지게 다물고 고개를 주억거린다. 춘천에서 온 소설가 권도옥 언니의 새빨간 코트가 눈부시다. 언니는 누군가를 붙잡고 뭔가 자꾸 이야기하려 애쓰고, 그 이야기를 들어주다 뒤풀이 자리에 늦게 도착한 평론가 이성욱 형은 타인의 비밀은 아무래도 버겁다고 쓸쓸한 낯빛을 띤다.
지금은 그들 모두가 이 세상에 없다. 병으로, 혹은 스스로 세상을 등져 아까운 나이에 할 말을 너무 많이 남겨두고 떠났다. 지금은 절판되어 구하기도 힘든, 권도옥 언니가 사인해 보내준 소설집 제목은 ‘그래도 인생은 계속될 것이다’였다. 아직도 나는 문학 속의 불멸을 꿈꾸었던 그들을 기억한다. 추억 속에서, 그들은 영원한 청춘인 동시에 나의 애틋한 동업자들이다.(김별아, ‘추억속 그 사람-문학 속에서 불멸을 꿈꾸던 文人들’, 동아일보, 2003.01.26)
『톨스토이처럼 죽고 싶다』는 세 장으로 나뉘어 있다. <30대, 사자의 날들>에서 축구, 네덜란드, 극기 훈련, 게임 등의 자잘한 소재를 다룬다. 삶은 소모적이라고 단언하지만, 그래서 가치 없는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제1부 <30대, 사자의 날들>이 삶에 대한 짤막한 성찰들이라면, 제2부 <경유지에서 쓴 일기>는 인도 기행의 길에서 만난 죽음에 대한 감상이다. 그리고 제3부 <자살, 그 살인의 심리학>에서 ‘로망 롤랑의 시처럼 자살을 반대하는 최후의 논거는 삶, 그 자체일 뿐이다’라고 결론을 마련한다.
책은 제1부에서 <30대, 사자의 날들><축구처럼 살고 싶다><내가 망명하고 싶은 나라><술 취한 밤><나의 마야><여자로 살아간다는 것><나는 극기훈련이 싫다><라미아><연애, 그 달콤 쌉싸름한 성장의 묘약><울기(鬱期)에서 벗어나는 방법><드라이빙 드라이빙><한국 성범죄의 근본문제><해방은 세상의 여성화에 있다><물신예찬> 등의 주제를 담고, 제2부에서 ‘표류의 기록’이란 대주제하에 <여행의 적기><내 인생에서 지워진 스물여덟 시간><내 앞에서 불타던 열두 구의 시체><톨스토이처럼 죽고 싶다><실종의 꿈><시간과 중력><죽음에 관한 두 개의 삽화><인간의 조건><신비주의자와의 동행><경유지에서 쓴 일기>, 그리고 제3부에서 <예정된 배반><너는 나에게 무엇인가><생활인들의 해돋이><건망증, 기꺼이 너와 벗하리라!><삶, 그리고 소설><내 영혼의 난만한 빛><통증에 갇힌 채로><헤어숍 리틀 요코하마><눈부신 날의 추억 하나><자살, 그 살인의 심리학> 등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서 우리는 많은 책들과, 사건들, 철학자들을 만날 수 있다. 일기 또는 육아일기이기도 하고, 여행문이기도 하고, 독서감상문이기도 한 듯해서, 딱 뭐라 말하라면 ‘산문집’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리저리 내키는 대로 돌아다니고 주제를 옮기면서 내미는 김별아 소설가의 신선한 생각을 읽게 된다. 특히 다음과 같은 몇 대목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내 영혼의 난만한 빛>
아이를 낳던 날은 눈이 내렸다. 진통이 오는 배를 움켜잡고 차에서 내려 응급실을 향해 걸어 들어갈 때 한두 송이 뿌리기 시작한 눈발이 분만실 창밖으로 함박눈이 되어 나리고 있었다. 열 개 남짓 되는 침상을 한 자리씩 차지하고 누워 저마다의 고통에 뒤척이던 산모들 중 누군가 신음처럼 말했다.
“눈이 오시니…… 오늘 태어나는 아이들은 식복이 있겠어요.”
한 마리 양순한 암컷으로 핏덩이를 쏟아내고 기진하여 실려온 병실에서, 나는 다시 나리는 눈을 보았다. 절로 눈물이 났다. 2인실의 옆 침상에는 좀 전에 분만대기실에서 새 생명의 발복을 기원했던 산모가 수술을 마치고 있었다. 40도 넘은, 파계승 출신이라는 노산모였다. 우리는 말없이 피를 흘리며 누워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생애의 무엇이 끝나고 무엇이 시작되었는지……. 우리가 진정 무슨 일을 하고 돌아와 치명상을 입은 짐승처럼 널브러져 있는지……. 스물여덟의 나도, 불혹을 넘긴 사연 많은 전직 여승도 똑같은 침묵으로 응수할 수밖에 없었다.
<너는 나에게 무엇인가>
지금은 가물가물한 연애의 기억을 돌이켜보면, 나는 그 황당한 놀음 속에서 언제나 한 가지 질문에 완강히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상대에게 묻기 이전에 나 자신에게 묻곤 했다.
너는 나에게 무엇인가. 과연 무엇이기에 나를 흔들고, 뒤척이게 하고, 너에게 붙잡힌 시선을 뗄 수 없어 설레게 하는가. 너는 무엇인가.
지금 내 곁에서 새근새근 잠든,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내 지상의 가장 큰 사랑에게 또다시 묻는다.
너는 나에게 무엇인가.
나는 몸뚱어리를 샅샅이 비추는 거울인가. 짧은 코와 두터운 입술, 얇은 머릿결과 긴 허리, 비루한 육신으로 모자라 내장까지 투명하게 비추는 반사경인가. 그리하여 나를 한없이 부끄럽게 하는가.
<인간의 조건 (표류의 기록 8)>
누군가 당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빈손을 내밀고 있다. 흉하게 일그러져 번들거리는 화상이나 그 얼기설기 대충 꿰매어놓은 접합부가 선연한 자상의 흔적을 들이대며 적선을 구하고 있다. 그가 지어낼 수 있는 가장 가련하고 슬픈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 얼굴은 와삭 구겨진 종이처럼 주름투성이다. 이가 다 빠져버려 검은 우물처럼 음습한 입을 벌려 몇 마디의 신음 같은 소리를 내뱉는다. 당신의 발밑에 머리를 조아린다. 흙투성이 신발에 입을 맞춘다. 뼈마디가 앙상한 빈손이 당신 눈앞에서 흔들린다.
그럴 때 당신은 어떤 기분을 느낄 것인가? 동정심? 자비심? 인간에 대한 뜨거운 연민? 아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아마 화를 낼 것이다. 짜증을 낼 것이다. 그를 향해 발길질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모욕감을 느낄 것이다. 불쾌감 때문에 구역질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물신예찬>
물신이여, 영원하리라. 어떠한 순수도 타락시킬 수 있는 밀약이자 마약, 엄청난 전염성으로 번성하며 일단 감염되면 백신도 없는 불치의 신이시여.
그대 일찍이 종교와 예술이라는 경쟁자를 가졌으나 가차없이 그들의 대항을 물리쳤도다.
종교는 그대와 밀통하고 교배하여 생명을 탄생시키니 그 육신은 양귀비처럼 붉고 영혼은 환각으로 화려하여라.
예술은 그대의 손아귀에 그 가련한 모가지를 잡혔으니 그것을 마음껏 잡아 흔들며 숨통을 조였다 풀며 그대는 예술의 생과 사를, 빈곤과 융성을 두고 희롱하노라.
▣ 소재와 주제의 다양성 구사가 탁월한 작가
소설 『꿈의 부족』은 김별아 소설가의 또 다른 특징과 역량을 독자들이 감지할 수 있게 한다. 『꿈의 부족』은 소설집으로, 표제작인 <꿈의 부족>을 비롯해 <삭매와 자미>, <8월 23일>, <대관령>, <샹그리라 빌리지>, <첫사랑>, <지옥의 사랑>, <비너스와 큐피드의 알레고리> 등 8편의 작품들이 담겨 있다.
한 두 마디의 말로 이 책 전체의 주제를 설명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중국 후한 시대를 배경으로 삼은 <삭매와 자미>, 말레이시아 삼림 속에 현존했었다는 원시 부족의 이야기인 표제작 <꿈의 부족> 그리고 16세기 말～17세기 초의 남미 페루를 무대로 한 <8월 23일>등 작가의 이번 작품에 시공간적인 제약은 거의 없어 보인다. 소재와 주제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작가는 완전한 거짓말쟁이(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 게 아닐까? 또한 <대관령>은 고향 강릉과 학생운동권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창작 원형’을 짐작케 한다.
『꿈의 부족』에 대해 조선일보 김광일 기자는 다음과 같은 서평을 남겼다.
신화는 유기체다. 생성과 소멸은 항상 현재적이다. 당대의 주인공들이 모를 뿐이다. 꿈이 깨졌다고 보이는 이 시대도 다른 형태의 악몽이다. 김별아는 그렇게 외치고 있다. 여러 장편들을 앞세운 지금에야 늦깎이처럼 내미는 첫 소설집의 농축적인 테마다. 중단편 8편을 추리고 또 추렸다.
표제작인 <꿈의 부족>은 작가의 이러한 생각을 밀도 있게 표출한다. 주인공은 열세 살 소년 ‘리아나’다. 시공간은 19세기 혹은 20세기 초 말레이시아로 보이는 어느 밀림 속 부족사회다. 밤을 지키는 신령의 지팡이에 박혀 빛나는 달이 이지러졌다 새로 돋을 무렵, ‘리아나’는 모두가 잠든 시각에 깨어나 남몰래 산을 오르며 화려한 성인식을 준비하고 있다. 아버지는 ‘아로에토’라고 불리었다. 부족에서 꿈길의 인도자이며 꿈의 의식을 주재하는 제관이었다.
부족민들은 꿈속에서 일어난 일들을 실제로 믿고 그에 따라 현실에서 보상을 한다. 꿈과 현실의 동화(同化)다. 그것이 평화의 열쇠다. 칼로 찔러 피를 흘리는 싸움은 꿈속에서 치르고, 현실에서는 항상 화해의 선물을 교환한다. 그러다 이 마을에 백인 약탈자들이 찾아오는데…. 값싼 마약에 취한 ‘리아나’는 그 약탈자를 안내하는 비루한 끄나풀로 전락해 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한다. “꿈을 믿지 못하는 순간, 우린 이 평화롭고 행복한 꿈에서 영원히 깨어나 버려, 다시 꿈을 꿀 수 없을 게다.”
김별아의 소설은 남성적이다. 전설이 남긴 당찬 기상에 남장한 소녀장수 처럼 글혼을 불어 넣는다. 주인공은 날랜 용사이거나 꿈과 서정으로 가득찬 소년이다. 평론가 방민호가 주저 없이 걸작으로 손꼽는 <삭매와 자미>도 같다. 후한 헌제 때 감숙성 장수 삭매를 주인공으로 중국 서역의 모래바람 속에 피어난 사랑과 배반 그리고 인신공양(人身供養)의 샤머니즘을 섞는다. 시공의 경계가 없는 상상력과 취재가 독자를 황홀하게 만든다. 근래 보기드문 소설집이다.(김광일, ‘시공을 넘나드는 꿈에 대한 상상력 매력’, 조선일보)
김별아 소설가는 이 작품에서 이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더 높은 것을 추구하라고, 중심이 말하는 질서를 믿지 말라고, 죽음조차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아가라고 말하고 있다.
▣ 문학과 체험의 ‘상관관계’에 대한 답을 제시하다
김별아의 소설 『개인적 체험』은 그동안 논의되어 왔던 문학과 체험간의 상관관계에 대한 답을 제시하기도 한다. 신수정 문학평론가의 견해를 한 번 살펴보기로 하자.
체험은 문학의 영원한 모태인가. 문학적 진정성은 항상 체험의 강도에 비례하는가. 김별아의 『개인적 체험』은 이 해묵은 질문에 하나의 답을 마련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가장 중요한 소설이란 자기 자신이 주인공인 ‘삶의 소설’일 뿐이며 ‘치열하게 쓴다는 것은 끝끝내 치열하게 살아낸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고3 겨울방학 때 체험한 두 달 가량의 버스안내양 생활, 총학생회 집행부에서 경험한 분신정국의 어두운 이면들, 대학을 졸업하고 합류한 공장활동 등 작가의 ‘치열했던’ 20대를 담고 있는 이 소설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여타의 후일담 소설들과 구별되지 않는다. ‘386’세대의 운동권 경험과 달라진 현실에 대한 회의는 이미 공지영을 비롯한 많은 작가들에 의해 되풀이되어 온 바 있는 세대적 체험이다．
주목되는 것은 무엇보다 이 소설이 추구하는 ‘개인적 체험’의 목적이다. 열 아홉 살의 화자가 일찍이 버스안내양 생활을 해보기로 결심한 이유는 글쓰기를 평생의 업으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화자가 생각하는 제대로 된 글은 ‘체험없는 관념의 뿌리’에서 나온 것이 아닌 ‘삶의 급소를 속속들이 묘파하는 날카롭고도 쓰라린 글’이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의 본령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삶의 밑바닥까지 닿아 그 부패한 정경에 코를 비빌’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김별아의 ‘개인적 체험’은 혹시 문학(소설 쓰기)에 이르기 위한 사다리는 아닌가. 그가 아무리 ‘삶’의 우선성을 강조하더라도, 거기에는 이미 그러한 삶을 요구하는 ‘문학’이 선험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우리는 김별아의 소설을 통해 특이한 형태로 굴절된 예술지상주의의 한 단면을 본다. 이 예술지상주의의 기원은 소설에서 드러난 대로 <토니오 크뢰거>의 작가 ‘토마스 만’과 <녹두꽃>, <타는 목마름으로>의 시인 김지하다. 그들을 전범으로 한 문학에의 헌신이 그에게 소시민의 일상적 삶에서 벗어난 버스안내양, 운동권 여학생, 그리고 여공으로의 전신(轉身)을 요구했던 것이다.
삶의 구체성을 향한 ‘개인적 체험’에의 열망은 문학으로 현상하는 ‘개인적 관념’에의 열망과 다르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김별아가 그토록 강조하는 경험주의는 맹목적 관념주의의 도치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이 관념주의는 문학이란 ‘나긋나긋하고 보드레하고 달착지근한 감상과 거짓 환희가 넘쳐흐르는 글’이라는 신념만큼이나 위험하다. 그것은 때로 그것이 부정해온 ‘허위의 문학’만큼이나 ‘문학적 허위’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체험의 진정성은 문학적 완성도의 보증수표가 될 수 없다. 정녕 아직도 ‘어리석은 자들의 역사’를 믿는다면, 그것의 문학적 표현은 어떤 것이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문학은 ‘개인적 신념’의 감상적 표백에 그칠 수 없기 때문이다.(신수정, ‘작품론-『개인적 체험』’, 국민일보, 1999.11.15)
체험은 절실한 실감을 담고 있지만 개인과 당대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다. 반면 역사와 신화의 세계는 보편적 관념성을 상징하지만 구체적 일상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김별아 소설은 이 둘의 영역을 오가며 창작된다. 상반된 것으로 여겨지는 이들의 간극은 김별아 소설에서 서로 통한다. 이는 ‘순정한 열정’의 단일함이 김별아의 작품세계 전반을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특히 『개인적 체험』에서 “체험 없는 관념의 뿌리에서 자라난 소설은 그 모양새가 아무리 아름다워 대중의 눈을 현혹시켜도 끝끝내 가슴까지 닿을 향기는 지니지 못한 무향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체험적 글쓰기가 단순한 소재의 차원이 아닌, 하나의 창작방법임을 밝힌다.
이후 그는 역사적 시공간을 배경으로 한 독특한 서사를 선보인다. <삭매와 자미>, <꿈의 부족>, <8월 23일>이 변화의 징검다리에 놓이며, 『축구 전쟁』과 『미실』이 이러한 특징을 본격적으로 보여준다.
김별아 소설에서 ‘열정’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추구하는 절대의 가치이자, 필멸의 존재가 무한한 ‘시간’의 흐름에 저항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제시된다.(박진영, ‘단순한 열정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 김별아 소설가가 바라본 性의 이면, 그것은 족쇄와 부채
새롭게 출현하는 신진 여성작가들은 성 이데올로기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게 활공한다.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의 배수아, 『성교가 두 인간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문학적 고찰 중 사례연구 부분인용』의 송경아, 『내 마음의 포르노그라피』의 김별아 등이 그들이다. 셋의 문학적 경향은 물론 각각 독자적인 특성을 보이지만, 성 이데올로기와 관련하여 해체적인 면모를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남성에 의한 여성의 억압, 여성의 순결 콤플렉스 따위의 기존의 성 이데올로기로부터 이들은 거의 자유롭다. 그것들이 별로 문제되지 않는다. 남성의 여성 억압이나 소유를 비판하거나 슬퍼하기보다는 스스로를 소유하는 방법이나 역으로 남성들을 소유하는 에로스의 새로운 지평을 그들은 알고 있다. 그것은 성 이데올로기 및 성 윤리가 구축해 놓은 금기를 넘어서는 일로부터 비롯된다. 금기를 넘어서 남녀의 상호작용이 동등하게 이루어질 수 있기를 욕망한다. 자기 감정에 솔직한 그들의 에로스는 부단히 금을 넘어서 금 밖의 지평을 밝히는 꺼지지 않는 불꽃의 정념이다. 선배작가 김형경이 넘지 못했던 ‘벽’은 그들에게 이제 있어도, 없다. 있는 것을 자꾸 없애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쾌락의 원리, 욕망의 원리에 충실하고, 현실의 원리, 규범의 원리의 이단자들이다.
김별아의 경우를 보자. 『내 마음의 포르노그라피』는 여성적 자기 발견과 여성을 넘어가는 자기 인식 과정을 잘 보여준다. 기존의 성장소설에서 대부분의 주인공들이 기존의 교양을 습득하고 창조적으로 터득함으로써 사회적 인격적 성장의 길을 열어나갔다면, 이제 신세대 김별아의 경우는 기존의 교양을 혁파하면서, 욕망의 경제원리를 따라가면서 성장한다는 점에서 엄격하게 변별된다.(‘타나토스/에로스/에코스-90년대 여성소설의 징후 읽기’, 『문학동네』4호)
김별아 소설가는 어린 시절부터 여성과 성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이는 여느 여자아이들처럼 관심과 죄의식의 팽팽한 갈등이기도 했다. 그는 “호기심과 욕망은 여태까지 내 성장을 이끈 친근한 벗이었고, 내 발목을 잡는 족쇄였고, 내가 마지막으로 해방될 부채”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런 체험들은 장편소설 『내 마음의 포르노그라피』에 간접적으로 스며들어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소설가 이순원은 “나는 우리나라에 이만큼 잘 쓰여지고 의미 있게 쓰여진, 성을 주제로 한 여자의 성장소설을 읽은 적이 없다!……. 어쩌면 이 책은 그대의 발끝을 아슬아슬하게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모든 소녀들, 처녀들, 기혼여성들과 짝을 이루는 남자들 역시 어린 시절의 호기심에서부터 점차 자라면서 느끼게 되는 마음 안의 욕망에 이르기까지 한 여자의 성과 성의식의 성장을 다룬 소설이다.”라는 서평을 남겼다.
김별아 소설가는 책의 첫머리, 작가의 말에서 “호기심과 욕망은 여태까지 나의 성장을 이끈 친밀한 벗이었고, 내 발목을 잡는 족쇄였고, 내가 마지막으로 해방될 부채이기도 하다. 나는 이 글이 풍선처럼 터질 듯한 호기심을 지닌 소녀들과, 죄의식과 갈등에 들끓고 있는 미혼여성들과, 탄로나버린 비밀에 대한 허탈함과 모성이라는 세습된 굴레에 사로잡힌 기혼여성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나는 그들이 지금보다 더 솔직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본문에 쓴 대로, 확신하건대, 이 세상에 잠기고 녹슨 문은 있을지언정, 처음부터 열리지 않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문은 없는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다음은 『내 마음의 포르노그라피』의 가장 마지막 대목으로, 주인공이 남기는 말이다. “이제 비밀은 없다. 세상을 속이고, 나 자신마저 속이는 비밀 따윈 없다. 나는 내가 키워 낳은 새로운 세상을 향해 간다. 그곳에서 나는 진정으로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다시 배울 것이다. 오로지 본능의 홑눈으로 나는 주시하는 저 생명, 또 다른 나를 위하여.”
『내 마음의 포르노그라피』를 처음 발표했던 1995년만 하더라도 성에 대한 담론(이야기)은 아주 조심스럽고 그 수준도 낮았다. 여성들이 스스로 성에 대해, 혹은 섹스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어려울 때였다고나 할까. 지금은 섹시하다는 말이 자연스러운 칭찬이지만, 그때만 해도 그런 말조차 어렵고 조심스러웠다는 것도 사실이란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김별아 소설가는 현재 서울시에서 만들고 있는 청계천 문화다리 22개 중 11개교에 소설을 상재하는 기획에 참여하고 있다. 그 중에서 ‘영도교’에 바치는 역사 소설을 쓰는 중이다. “영도교는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떠나는 단종과 정순왕후가 마지막으로 헤어진 다리에요. 당장은 빨리 예전의 ‘지루하고 단순한 생활’로 복귀하는 것이 목표이고요, 멀게는 죽을 때까지 다른 무엇도 아닌 소설가로만 사는 것이 목표입니다.”라고 말하는 김별아는 영원히 소설가로 살아가야할 ‘짐’을 지고 있는 듯해 보인다. 그렇지만 그 ‘짐’이 무거워 그의 의지가 중간에 꺾이는 일 또한 절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길 기원하는 바이다.
김별아 소설가, 이제 그는 한국 소설문단의 큰 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는 단지 ‘세계문학상’ 수상작가라는 점 하나만 놓고 하는 말은 아니다. 지금까지 발표되어 각계로부터 좋은 반응과 평가를 얻고 있는, 다른 많은 작품들과 함께 종합적으로 판단한 견해이다.
김별아 소설가는 지금까지의 작가생활 기간보다 앞으로 훨씬 더 오랫동안 창작에 임할 것이고, 『미실』보다 더 좋은 반응을 얻게 될 작품들을 세상에 많이 선사할 것으로 필자는 확신한다.
* 월간 <시사문단> 2007.8월호 헤드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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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火刑日》에 나타난 우당의 저항시 세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