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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룽지라도 예사 누룽지가 아닌 맛, 시인 안도현 * / 안재동
▣ 향토 내음 물씬한, 타고난 우리 땅의 서정 시인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 관심 없는 사람.
활엽수를 좋아하는 사람, 상록수를 좋아하는 사람.
자작나무를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자작나무를 좋아하는 사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
두 부류 중에서 앞의 부류에 속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호감 가는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세상에 셀 수 없이 많은 게 나무 종류인데, 그 중 자작나무를 알아보고 그것에 특별한 애정을 느끼는 공감은 비슷한 전류가 흐르는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안도현 시인의 동화에서 <내 마음의 자작나무>를 읽었을 때, 내가 쓸 말을 빼앗긴 것처럼 느낀 것도 그 때문이다. 읽을수록 내 마음이 그 마음이다. 시인이 새로 입주한 아파트 화단에 조성된 자작나무를 발견하고 들떴던 마음, 행운으로 여기는 것, 그러면서 ‘안 그래도 신경 쓸 일이 많은 세상에 나무를 보고 마음이 들뜬다는 것은 하나의 사치에 속할 수도 있다’고 설레는 자신의 마음을 눙쳐 말하는 것까지 그대로 공감할 수 있었고, 마치 오래 전부터 알던 사람하고 마주 보고 그 이야기를 듣는 듯한 기분이었다.[이혜숙,『나는 팝콘이다』(문학관, 2002)에서]
김용택 시인은 언젠가 안도현 시인을 소개하기를 “안도현은 타고난 우리 땅의 서정 시인이다. 그의 타고난 시적 재능은 세상을 저인망으로 훑는다. 그의 시선이 가서 머물고 닿으면 그것이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일지라도 금세 눈부신 날개를 단다. 우리의 유구한 전통적 서정시의 뿌리에 가 닿을 뿐 아니라, 그의 시적 역량이 한껏 빛을 발하는 시들로 그득하다. 세상을 따뜻한 가슴으로 껴안는 안도현의 가없는 사랑이 우리의 식어가는 가슴을, 우리의 죽어가는 산하의 들꽃들을 봄빛같이 따사로운 손길로 어루만진다.”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을 선뜻 이해하기 힘든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안도현 시인을 알게 될수록 아마 누구나 그런 느낌이 피부에 확연히 와 닿게 될 것이다. 어느 독자는 “그의 시는 다시 읽어도 항상 가슴을 움찔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 힘이 도대체 무엇인가? 아마도 가장 큰 힘은 그 빛나는 상상력일 것이다.
그가 주변의 자연물들에 하나씩 인격을 부여하면서 다정스레 말을 건네면, 죽은 듯 무표정하던 자연물들에 표정이 생기고, 목소리가 생긴다.”라고 말하기도 했고, “당신의 글은 희망입니다. 고맙습니다.”라거나, “안도현님의 시는 별미다. 별미로 먹는 누룽지 같은 맛이 나는데 구수한 누룽지 본연의 맛이 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설탕이나 고추장을 찍어 먹는 느낌이 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누룽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끔 하는, 그야말로 예사 누룽지가 아닌 것이다. 시 <동백꽃 지는 날>은 튀긴 누룽지 맛이 난다. 오늘도 작가님은 어디에서 또 어떤 누룽지를 만들고 계실는지.”라는 말도 어느 웹사이트의 독자서평란에서 볼 수 있었다.
안도현 시인은 지금까지 첫 창작시집《서울로 가는 전봉준》(민음사, 1985/ 문학동네, 1997 재출간)을 비롯해《모닥불》(창작과비평사, 1989),《그대에게 가고 싶다》(푸른숲, 1991),《외롭고 높고 쓸쓸한》(문학동네, 1994),《그리운 여우》(창작과비평사, 1997),《바닷가 우체국》(문학동네, 1999),《아무 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현대문학북스, 2001),《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창비, 2004) 등 8권과 애송시집《그 작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애착》(나무생각, 1999)을 차례차례 세상에 냈다. 그의 유명세에 비하면 창작시집 8권이라면 ‘불과 8권’ 혹은 ‘무려 8권’으로 느낌이 다소 엇갈리게 와 닿을 수도 있겠는데, ‘불과 8권’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불과 8권’으로 오늘날의 명성과 그 독보적인 시세계의 위상을 확보한 점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참고로, 2005년 5월 23일 현재 국내 최대의 포털사이트인 네이버에서 그의 작품이 게재된 블로그가 11,300여 개, 카페가 1,070여 개나 발견되었다.
또한 ‘무려 8권’이란 측면으로 받아들인다면, 1981년의 대구매일신문 등단을 기준으로 하자면 25년여 간의 창작 활동 기간을 결코 게으르지 않게 보낸 모습이 상상된다. 그 동안 그는 시창작 뿐만 아니라, 동화나 에세이 등 산문창작 활동까지 병행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안도현을 시인으로만 알고 있지만 동화나 에세이도 꽤 많이 썼으며 명망도 상당히 높다. 특히 ‘어른을 위한 동화’인《연어》(문학동네, 1996)는 첫 출간 이후 지금까지 백만여 부나 팔린, 그야말로 실질적인 밀리언셀러다. 참으로 다재다능한 작가라 부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사실들이다. 안도현 시인이 사실상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그의 연시집 《그대에게 가고 싶다》(푸른숲, 1991)와《연어》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안도현 하면 동화작가로 통할 정도로《연어》의 인기와 인지도가 대단하다.
바로 그《연어》를 비롯해,《관계》(문학동네, 1998),《사진첩》(거리문학제, 1998/ 이룸, 2000 재출간),《짜장면》(열림원, 2000),《증기기관차 미카》(문학동네, 2001),《민들레처럼》(이룸, 2003),《나비ꡕ(리즈앤북, 2004) 등이 그가 출간한 어른을 위한 동화이며,《만복이는 풀잎이다》(태동출판사, 2002)는 그림동화이다.
또한 그가 저작한 산문집도《외로울 때는 외로워하자》(샘터, 1998),《사람》(이레, 2002), 《100일 동안 쓴 러브레터》(태동출판사, 2004) 등 3권이나 되고, 잠언집인《안도현의 아침엽서ꡕ(늘푸른소나무, 2003)도 냈다.
그런 그의 활발하고 탁월한 저작활동으로 인한 당연한 결과로 보이지만,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제1회, 1996), 『소월시문학상』(제13회, 1998), 『원광문학상』(2000), 『노작문학상』(제1회, 2002), 『모악문학상』(제10회, 2002), 『이수문학상』(제12회, 2005) 등 많은 상을 받기도 했다.
▣ 전교조 관련으로 해직까지 당했던 국어교사 출신 문학교수
안도현 시인은 1961년 경북 예천에서 출생하였고, 1977년 대구 대건고등학교에 입학, 문예반 ‘태동기문학동인회’에 가입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문단에 잘 알려진 홍승우·서정윤·이정하 시인, 박덕규․권태현 소설가, 하응백 문학평론가 등이 대건고등학교 출신 문인들이다.
그는 고교시절에 벌써 『학원문학상』을 비롯하여 전국의 각종 백일장과 문예현상공모 등에서 수십 차례 상을 받기도 하였다. 원광대학교 국문과 1학년 재학 시절인 1981년에는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 <낙동강>이 당선되어 그의 문학적 재능을 세상에 당당하게 알렸고, 대학 4학년 때인 1984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됨으로써 세인들의 주목을 끌었다.
1985년에는 이리중학교에 국어 교사로 부임하게 되고, 그 무렵부터 김백겸과 고형렬, 양애경, 김경미, 고운기 등과 ‘시힘’ 동인 활동을 시작한다.
1989년 8월에 이르러서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이리중학교에서 해직을 당하고 1994년에는 전북 장수에 있는 산서고등학교로 4년6개월 만에 복직하게 된다. 그러다 1997년 2월에 교사직을 그만 두고 전업 작가 생활을 시작하고 1998년 9월에는 전주 근교인 완주군 구이면 광곡리에 집필실을 마련한다.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받은 점도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전업작가 생활이 거의 6년여가 되어갈 시점이던 2004년 9월부터 우석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부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흥규 문학평론가(고려대 교수)는 안도현의 시 <이리중학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한 적이 있다.
시인들은 일반적으로 기쁨보다는 고통과 슬픔에 대해 더 많이 노래한다. 충만함보다는 결핍이, 광명보다는 어둠이 더 자주 시의 소재가 된다. 그리고 이 점은 특히 우리 현대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양상이 아닌가 한다. 영어로 번역된 한국 현대시 선집을 읽고 나서 한 외국 시인이 “당신네 나라의 시는 왜 이렇게 어둡고 고통스러운 분위기로 가득 차 있는가”라고 물은 일은 단순한 인상의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
시로 하여금 그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요인은 물론 객관적 현실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개개인이 영위하는 나날의 삶에서부터 나라 전체를 움직이는 정치에 이르기까지 사물과 사람들이 그 마땅한 모습으로 있지 못한 사회, 뿐만 아니라 마땅한 자리에로의 자기회복 내지 발전을 위한 자연스러운 욕구가 억압되는 사회―이것이 우리 시에 고통과 어둠의 빛깔을 드리우는 근본적 배경이다.
안도현씨의 시 <이리중학교> 역시 이러한 주제적 연관과 분위기를 보여 주는 작품이다. 한 교사의 내성적 독백으로 구성된 이 작품에서 「이리중학교」라는 이름은 전라북도 이리시에 있을 특정한 학교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인 동시에 이 나라의 수많은 비슷한 학교들 모두를 아우르는 보통명사다. 그렇게 본다면 그것은 또 어찌 학교뿐이겠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의 모든 구석이 다 제각각의 「이리중학교」이기도 할 것이다.(한겨레신문 제1244호에서)
과거 소련의 몰락과 이념의 퇴조, 미국의 초강대국화와 문민정부 탄생 등 90년대 전반에 대내외적으로 무수한 사건들의 발생과 전교조 관련으로 해직까지 당해 어려움을 겪는 등 암중모색의 시기에 대한 안도현 시인의 시대의식은 어떤지에 대한 대화 기록이 있는데(『현대시』와의 대담, ‘현대시가 선택한 이달의 시인/대담-시인 안도현을 찾아서’, 1998년), 그것을 살펴보면 “시인은 역시 시대를 설거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쌀을 안치는 사람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중에 차려질 밥상 앞에 앉겠다고 기대해서도 안 되지요. 찬물에 손을 담가 쌀을 안치면서 풍성한 밥상에 대한 꿈을 꾸는 것, 그게 시인의 역할이 아닐까요?”라고 말한 대목이 퍽 인상 깊다. 또한 안도현 시인의 시가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게 된 근본적 요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도 오래 오래 기억에 남을 말을 남기고 있다. “저는 가능하면 쉽고 짧은 시를 쓰려고 합니다. 근래 일부 젊은 시인들의 시에 드러나는 자기중심적 넋두리의 과잉, 쓸데없는 요설과 기괴한 상상력의 범람, 의도가 불분명한 난해성 등은 앞으로 내가 시를 더 읽어야 할 것인지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합니다. 즐겁지 않은 시를 읽는 데 아까운 시간을 빼앗길 필요가 있을까요.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시는 단정한 모습을 보여야 하고, 세상이 차가울수록 시는 따뜻한 편에 서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태평성대가 온다면 저는 뒤틀린 언어로 세상을 뒤트는 과격한 시를 쓸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죠. 뭐랄까, 화해의 양식으로서의 서정시, 그런 것을 꿈꾸다 보니까 제 시를 읽고 시가 따뜻하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많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현대시』(1998)에서]
▣ 안도현 시인의 초기 시학이 궁금하다
오늘날 문학애호가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는 안도현 시인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그의 시인으로서의 출발점의 상황들을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 차원에서 과거 최동호 문학평론가(고려대 교수)가 안도현 시인의 첫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에 수록된 시들에 대한 시평을 다시 들여다본다.
새해 아침 첫눈을 밟고 가면 깔깔한 추위와 더불어 신선한 바람이 다가선다. 안도현의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을 읽으면서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미지의 신진 시인에 대해 말하는 것은 마치 새해 아침 첫눈을 밟고 가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거기에는 알지 못할 기대와 누르기 어려운 흥분이 있다. 또한 오해와 실망이 개재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안도현의 시집 전체에서 받는 느낌은 그의 깔깔한 시적 진지성이다. ‘깔깔한’이란 말은 촌스럽다는 뜻이기도 하며, 만만치 않은 객기와 취기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세속적인 공해에 물들지 않았다는 증거이며, 또한 신인으로서 그가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의 시적 화자가 고백하고 있는 대로 스물 두 살의 젊은 시인의 고백적인 기록이기도 하다는 것이 그의 시집에 대한 필자의 전체적인 느낌이다. 시작품을 시인 자신의 고백적 표현으로 치환하려는 것은 유치한 단순논법일 터이다. 그러나 한 시인의 시집에서 정신의 편력을 드러내는 일련의 내면적 독백을 감지할 때 시적 진술은 이미 고백적인 방식으로 씌어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오래도록 서있으면 고향이 보인다
해와 달 향하여 이 땅에 처음 울며 눈뜬 뒤
오늘은 다시 豫感의 푸른 속눈썹 반짝이는
우리 서럽고 팔팔한 스물 두 살이 보인다
떨리는 손끝에 몇 덩이 둥근 무덤을 얹어두고
나는 누구를 기다리며 여기 와 있나
이상하게 말 안 듣는 내 팔다리여
저 녹슨 들판을 주름을 잡으며 밀려오는 겨울 저녁이여
조금만 참으라구 조금만
3년 동안 잔밥내를 입술에 적시고
그저께야 떠나간 제대병들의 얼룩무늬 입김이
흰 꽃 눈송이로 뚝뚝 떨어지고 있구나
―〈초소에서〉제1-2연
전방의 눈발 속에서 예감의 푸른 속눈썹 반짝이는 스물 두 살의 초병인 화자는 포대경 속을 들여다보며 한반도 전체를 바라보고, 적을 바라보며 자신을 바라본다. 목숨보다 단단한 총구를 매만질 때, 그는 죽음의 땅도 보일까 반문하면서 견인의 정신으로 눈발 속에 서 있어야 하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은 시인 자신의 인간적 성숙과도 관계된다. 그의 시 〈낙동강〉은 그의 출생지이며 삶의 터전이며 또한 상상력의 원천이다.
그러나 그물을 빠져 달아난 한 뼘 미끄러운 힘으로
지느러미 흔들며 헤엄치는 銀魚떼들
나는 놓치고, 내 살아온 만큼 저물어 가는
외로운 세상의 江岸에서
문득 피가 따뜻해지는 손을 펼치면
빈 손바닥에 살아 출렁이는 강물
아아 나는 아버지가 모랫벌에 찍어 놓은
발자국이었다 홀로 서서 생각했을 때
내 눈물 웅얼웅얼 모두 모여 흐르는
洛東江
그 맑은 마지막 불빛으로 남아 타오르고 싶었다.
- 〈낙동강〉 끝 3-4연
이 시에는 강을 중심으로 지속되어 온 삼대의 삶이 형상화되어 있다. 할아버지로부터 시작하여 아버지, 그리하여 나에게 이어지는 끈끈한 혈연의 연속이 낙동강의 모랫벌을 빌어 인식된다. 아버지가 나에게 그물을 한 장 주었지만, 그 그물을 빠져 달아나 지느러미를 흔들면서 헤엄치는 은어떼의 비유는, 빈 손바닥에 출렁이는 강물을 감지하는 것만큼이나 개성적이다. 빠져나가는 미끄러운 힘, 그러나 외로운 세상의 강안 모랫벌에서 아버지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가 흘린 눈물을 낙동강에 되돌려 줄 수 있는 시적 형상력은, 그가 전방 초소에서 죽음보다 단단한 총구를 매만지던 것처럼 그의 솜씨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그러나 위의 시에서 그가 홀로 외로운 세상의 강안 모랫벌에 서있는 것처럼, 그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정착적인 삶이 아니라 유랑적인 것이다. 그물을 빠져 달아나 헤엄치는 은어떼들을 보라. 우리는 이와 같은 예를 〈유민(流民)〉이나 〈풍산국민학교〉에서, 그리고 〈안행(雁行)〉 등의 시에서 읽을 수 있다. 그의 유랑민적 삶의 인식은 시 〈변방(邊方)에서〉에 드러나고 있는 것과 같이 변방의식으로 첨예화되며, 따라서 〈초소에서〉와 같은 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예감의 푸른 속눈썹이 반짝이면서 빛날 수 있게 되는 것이라 느껴진다.
이것이 낙동강에서 정착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었던 그가 만경(萬頃) 들로 나아간 경로일 것이다. 만경 들로 나아간 그의 삶의 일부를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 시 〈북일동〉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 사 년 동안 나는 줄곧 눈물 흘렸다
운이 없었다 운이
없었으므로 일찍이 나를 버린 여자가 없었으므로
손수건도 한 장 없었다
(……)
자취방을 옮길 때마다 왜
머리카락이 젖었을까 우기도 아닌데
매일매일 내리는 비를 보여주는 창문
안에서 외출은 삼가하였다
그 사 년 동안 그립도록
퉁퉁 불은 라면 먹고 쓸쓸해서
몇 군데 편지하고
오지 않을 답장을 하루종일 기다렸다.
―〈북일동〉처음과 끝
끝내 삶의 주변이나 밀폐된 공간 속에 맴돌아야 했던 대학시절의 체험 속에서, 그는 시대나 현실은 물론 한국 역사 전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다. 낙동강을 떠나 만경 들로 나아갔다는 것은 이런 점에서 결코 간단히 넘길 수 없는 중요한 문학적 체험의 전기가 된다. 아마도 북일동 시절 4년간의 그의 삶은 줄곧 눈물을 흘려야 하는 고통스러운 시기였음에 틀림없었겠지만, 그의 시를 위해서는 굳건한 지반을 만들어준 시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들이란 야성적이며 남성적인 대결자이다. 생존경쟁을 버텨내지 못한다면 그는 주변인으로 전락할 것이며, 시는 물론 삶 자체도 부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거칠게 주어진 삶의 외적 조건은 그의 변방의식을 더욱 첨예롭게 하였을 것이며, 삶을 위해서는 물론 시를 위해서도, 그는 굳센 의지로 북일동의 4년간을 감내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삶의 방향성은, 돌이켜 보면 80년대 초반 시대의식으로 팽창된 시적 열기와도 접맥된다. 이 점에서 그가 동학혁명의 영도자 전봉준을 내세우고 본격적으로 문단에 등단하였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나름으로는 절박하고도 필연적인 위기의식의 발로였을 것이다. 이 절박성이 그가 쓴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에 공감력을 부여한다.
눈 내리는 萬頃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琫準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 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 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 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하였네
못다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저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
우리 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목숨 타오르겠네
琫準이 이 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 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서울로 가는 전봉준〉 전문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란 다름 아닌 처형당하러 가는 전봉준이다. 우리는 서울로 가는 전봉준의 형형한 눈빛을 기억한다. 그것은 동학혁명에 실패한 무수한 농민들의 한을 꿰뚫어보고 있는 눈빛이며, 화자가 말하는 것처럼 봄바람 찾아오면 수천 개의 기상나팔을 불어 제낄 백성들의 실현되지 못한 개혁의 눈빛일 것이다. 이 시의 마지막 6연은 「척왜척화」와 같은 물결 소리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제5연까지의 강력한 전개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슨해지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타는 눈빛의 전봉준에 집약되는 동학혁명에의 민족적 의지를 이처럼 형상화시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그가 지닌 시적 자질의 표현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4년 동안 줄곧 비가 내리던 북일동 시절의 참담한 체험의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낙동강에서 만경 들로 나아간 그가 치러내야 할 자기극복의 과정이기도 하다. 개인적 체험과 민족적 시련이 동일시될 때, 안도현의 시적 인식은 〈만경평야의 먼 불빛들〉이나 〈들불〉로 이어지며, 다시 민족통일의 전망으로 뻗어나가 〈백두산 가는 길〉, 〈젊은 북한 시인에게〉, 〈기러기야 발해 가자〉와 같은 시들로 나아가게 된다.
그의 시적 관심이 이와 같은 부분에 집중되고, 80년대 중반에 처한 우리의 시적 지향서의 중심점이 여기에 놓여진다고 하더라도, 필자는 그의 이런 경향의 시들이 아직은 어설프고 무른 것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차라리 〈빈논〉과 같은 시에서 그가 부딪히는 절망이 더 구체적일 것이다.
아버지
아버지의 논이 비었습니다
저는 추운 書生이 되어 돌아와 요렇게 엎드려
빈 논, 두려워 나가보지도 못하고
껴안지는 더욱 못하고 쓸쓸한
한 편 시를 써보려고 합니다.
―〈빈 논〉제 1-6행
꿈에도 논에는 나오지 마라 하시던 아버지의 삶에 비하여 자신이 쓰는 시적 은유가 절대 부족함에 절망할 때, 그는 부족한 시를 써야 하는 궁핍한 밤을 극복해 갈 수 있을 것이다.
만경 들로 나아간 그의 시가 어떤 의미에서든 현실과의 격전으로부터 성취된 것이라는 점에서 이를 전체적으로 집약한다면, 그것은 그가 지닌 상승적 의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상승적 의식은 변방의식으로부터 정착하지 못하던 삶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이는 생활의 문제로부터 파급되어 왔던 것이다. 〈신혼일기〉나 〈집〉과 같은 시를 읽을 때, 안도현은 이제 소박하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삶의 절박성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는 최소한의 자기안정일 것이다. 그가 다음과 같이 새벽밥을 먹고 있는 한, 그의 시적 인식의 예각성은 살아있을 것이다.
동트기 전에
죽은 듯이 누웠다가 문득
벌떡 일어나 먹는 밥
지난 밤보다 더 큰 밤이 오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
밥을 먹는다
새벽밥이며
(……)
조선 천지 이집 저집
벌떡 벌떡 일어나서
한 등씩 불 밝히고 먹는 사람이여
그대 가르고 갈 바람 속에 놓인
시퍼런 한그릇 밥
새벽밥이여
―〈새벽밥〉1연과 4연
시퍼런 새벽밥은 살아 있다. 할 일이 많은 그는 새벽밥을 먹고 첫서리를 밟으며 걸어갈 것이다. 서럽고 팔팔한 스물 두 살의 그는 예감의 푸른 속눈썹을 빛내며 춥고 어두운 길을 걸어서 끝내 닿아야 할 나라로 갈 것이다. 이제 돌이켜 보면, 그의 시에서 느껴지는 깔깔함이란 쉽게 흐트러지지 않을 자신감의 일부일 것이며, 만경 들로 나아간 그가 체득한 야성적인 생명력의 표현일 것이다. 그가 지닌 야성적 생명력의 깔깔함이란 신인으로서 그가 지닌 독특한 개성이며, 그가 지닌 가능성의 발화점이 이 야성적 생명력에 있을 것이다. (최동호, ‘야성적 생명력의 시학’, 『문학사상』1986.1월호에서)
- 삶과 삶 사이 '간격'이 주는 여유 -
안도현 시인이 제일 최근에 낸, 8번째 시집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에 대해 황동규 시인은 다음과 같은 서평을 남기고 있다.
안도현은 화해의 시인이다. 불화 속에서도 그는 화해의 틈새를 찾아낸다. 그 행위 뒤에는 세계와 자신을 가능한 한 밀착시키려는 의지가 있다. 그는 세계를 아름답게만 보려고 하지는 않지만, 밀착이 아름다움을 만들어 준다.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오도카니 무릎을 모으고 앉아
여치의 젖은 무릎을 생각한다는 것
그 밀착은 예컨대 이끼를 ‘그늘의 육체’라고 부르게 하고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숲’에서 ‘간격과 간격이 모여/울울창창 숲을 이룬다’는 것을 발견하게 한다. 그리고 적막 안에서도 ‘풀숲에 호박이 눌러앉아 살다 간 자리’를 발견하게 한다. 적막에 간절한 모습을 주고 산불이 쓸고 간 폐허의 나무와 나무 사이의 간격에서 숲의 원(原)구조를 찾는 것이 큰 화해의 소식이 아니고 무엇이랴.
또한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에 수록된 시들에 대한 권혁웅 문학평론가의 시평들 중 인상 깊은 몇 대목을 적어본다.
안도현의 시에서, 삶과 사랑은 유의어(類義語)다. 안도현은 그 둘을 자주 치환해서 쓴다. 삶은 나와 당신에게 각각 소속되었지만, 사랑은 나와 당신의 관계에서만 생겨난다. 전자가 실체라면 후자는 형식이다. 시인은 이 둘을 고의적으로 혼동함으로써, 모든 개별자들이 서로 이타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주려 한다. 안도현의 시에서는 빽빽한 것이 아니라 성근 것, 가득 찬 것이 아니라 비어 있는 것, 번쩍이거나 캄캄한 것이 아니라 그늘을 드리운 것, 구멍을 찾는 막대기들, 나란히 선 것들이 다 사랑의 아이콘이다.
국민일보 정철훈 기자가 썼던 다음과 같은 서평도 특별히 가슴에 와 담긴다.
숨쉬기가 단순한 호흡이 아니라 본능 위에 얹혀진 초감각적인 운동이라는 것을 안도현의 시를 보면 단박에 느낄 수 있다. 그의 시를 읽으면 막혔던 숨이 확 트인다. 출근길 지하철 속에서,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직장 내 상명하복의 긴장 속에서 자신이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깜박깜박 잊어버리는 현대인에게 그의 시는 살아있는 숨쉬기를 불러온다. 안도현의 시는 빽빽하지 않고 성글다. 가득 차지 않고 비어있다. 양지가 아니라 그늘이다. 자동차가 장악한 대로가 아니라 인간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골목길이다. 그 성근 틈새로 사랑의 강물이 흐른다. 그는 삶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은 우리가 대면하는 세상 혹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그 사이의 간격이라고 노래한다. 그리고 그 같은 간격의 미학, 그늘의 미학은 자연스럽게 에로스의 세계로 확장된다. 하지만 그가 바라보는 에로스는 몸에 대한 소유를 초월한다. 그의 시는 우리 삶의 정면이 아니라 옆모습을 포착한다. 타인의 옆모습에서 나를 목격하는 발견의 미학은 그래서 정겹고 눈물겹다. 안도현에 따르면 사랑이란 정면에 서는 게 아니라 옆에 서는 것이다. 옆에 서서 서로에게 간격과 틈을 허락하고 그 사이로 강물이 들고 나는 것을 바라보고 듣는 일이 바로 사랑이다.(국민일보, 2004년 9월 16일)
세계일보 조용호 기자의 서평 하나가 더 눈에 들어오더니 금방 사라지질 않는다.
안도현의 데뷔작 ꡐ서울로 가는 전봉준ꡑ은 1980년대의 비극적 상황을 압축한 것이었다. 이후 그는 시대의 분노를 받아 적어 시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른바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시대가 바뀌면서 그의 시도 변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교사라는 직업을 던지고 전업 시인으로 자리 잡으면서 안도현의 가슴에 잡히는 시의 대상들은 작은 풀꽃이거나 나무이거나 눈 맑은 물고기들이었다. 그렇게 축적된 시집이 벌써 여덟 번째에 이르렀는데, 안도현 자신도 ꡒ언제쯤 시에 갇힌 나무와 꽃과 새를 풀어줄 수 있을까ꡓ 고민하는 중이다. 그 고민에 답하듯 이번 시집에는 비교적 가까운 시기의 이전 시집들에서 보여준 재치 넘치는 비유와 능청에서 한걸음 나아가 보다 묵직한 깊이를 일구어내는 연륜이 보인다. 이번 시집에 담긴 시편들도 안도현의 시답게 잘 읽히면서 따뜻한 울림을 주는 것들이 많다. 하지만 이 시편들에서 기실 독자가 느낄 따뜻함과 상큼함이란 시인이 물밑에서 피로 쓴 결과물인 것이다. 소쩍새는 하루저녁에 '간곡한 울음의 시집' 백 권씩이나 쓰는데 "나는 가난한 시 한 편을 붙들고 밤새 엎드려/ 한 줄 썼다가 두 줄 지우고 두 줄 지웠다가 다시 한 줄 쓰고 지우고 전전긍긍할 도리밖에 없다"(<전전긍긍>에서)고 시인은 고백한다. 하지만 그런 전전긍긍의 시간 덕분에 출구가 가까워지는 것이니 무엇이 문제이랴.(세계일보 2004년 9월 17일)
▣ 한국의 ‘생텍쥐페리’라 불리다
박민영 문학평론가는 어른을 위한 동화인 『연어』와 관련, 다음과 같이 기술(記述)하고 있다.
『연어』는 연어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한 작가와, 그가 쓰는 소설의 주인공인 연어의 이야기가 맞닿아 있는, 이른바 액자 소설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연어는 바다에서 자기가 태어난 강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모천 회귀성 어류다. 이 소설은 연어의 이러한 생태를 골격으로 하여, 주인공 ‘은빛 연어’의 일대기가 그려진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은빛 연어는 등이 푸른 다른 연어와 구별되는 별종으로 태어났으며, 그 외모로 하여 무리로부터 소외된다. 그러나 은빛 연어는 인간이 만든 쉬운 길이 아닌 연어만의 길, 즉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진정한 연어로 거듭나게 된다. 이 이야기에서 은빛 연어는, 모든 우화가 그러하듯이 턱이 큰 연어나 지느러미가 긴 연어 등과 함께 인간들을 알레고리적으로 비유한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은빛 연어의 의미가 아니라, 이 연어 이야기를 통하여 시인이 드러내보인 상상력의 편린들이다. 이것들은 보다 직접적으로 안도현의 시의식의 방향을 함축적으로 제시해 준다.(『현대시학』1997.10)
한편, 『문화로 엿보는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는 문화』(대한기독교서회, 2003)란 책의 저자인 이상훈의 견해에도 깊이 공감된다.
…어머니 같은 초록강을 따라 올라가면서 겪어야 했던 폭포수 앞의 시련…연어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묻는 그리움이었다. 이쯤에서 전해 듣는 감성 터치를 대하노라면 우리의 무심한 눈들도 서서히 한 꺼풀 벗겨져 나가는 경험으로 초대된다.
“연어를 위에서 내려다본다는 것, 그것은 연어를 위해서 불행한 일이다. 연어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람들의 눈은 틀림없이 물수리나 불곰의 눈을 닮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연어에 관심을 가지기보다 연어 알을 떠올리며 입맛을 쩝쩝 다실 것이 뻔하다. 그러니까, 연어를 완전히 이해하고 사랑하는 방법은 연어를 옆에서 볼 줄 아는 눈을 갖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약간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알기 쉽게 말한다면 마음의 눈을 갖는 것이다.”
작가의 질책이 범상치 않다. 그러한 깨달음으로 거울 앞에 선 때문일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점점 물수리나 불곰의 눈을 닮아가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 어느 틈에 ‘옆에서 보는 눈’은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인생들…‘마음의 눈’은 어디에 묻혀 있는 것일까?
“연어라는 말 속에는 강물 냄새가 난다.”고 운을 떼고 있는 작가 안도현을 지인(知人)들은 그를 한국의 ‘생텍쥐페리’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이상훈, 『문화로 엿보는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는 문화』에서)
그런가 하면, 김용택 시인도 “단순하고 간결한 동화적 상상력이 펼치는 깨끗한 이 연어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초록강을 따라 올라가는 한 마리 연어가 되어 내 삶을, 우리들의 삶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은빛 연어와 눈 맑은 연어의 아름답고 슬픈 꿈이 곧 우리들의 꿈이 되어 가슴을 파고드는 것을 나는 느낀다. 프랑스에는 『어린왕자』가 있고, 이제 우리 땅엔 잘 어울리는 안도현의 감동적인 『연어』가 있어, 이 땅을 다시금 소중히 보듬어 안게 만든다.”라면서 『연어』의 가치를 크게 부여하고 있다.
▣ 누구나 하찮게 여기던 무기체 ‘연탄’에 생명력을 부여한 시인
안도현 시인은 이른바 ‘연탄시인’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연탄’하면 안도현 시인이 떠오를 정도로 ‘연탄시인’이란 별명이 이젠 그의 고유 브랜드로 정착했다. 가히 특허급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보통사람들에겐 연탄이 그저 하찮은 무기체(無機體)인 연탄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안도현 시인의 눈에는 연탄이 살아 있는 생명체 그 이상으로 비추어졌고, 그것을 시적 가치로 탁월하게 터치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런 성공은 그의 어린시절부터의 성장배경을 제대로 파악한다면 결코 우연한 성공이 아니란 것을 이해하게 된다.
연탄과의 인연이랄 수 있는, 연탄과 얽힌 그의 성장배경을 잠시 되돌아보기로 하자. 안도현 시인 스스로가 언젠가 밝혔던 적이 있는 내용을 정리해 본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나는 고향을 떴다. 사촌형을 따라 대구로 유학을 가게 된 것이다. 낯선 도시에서 내가 처음 배운 것은 자취방의 연탄불을 꺼뜨리지 않고 제때 갈아주는 일이었다. 학교 앞에 있던 자취방은 부엌문이 없었다. 마당으로 향한 조붓한 툇마루 위에는 얇은 합판으로 짠 찬장이 하나 달랑 놓여져 있었고, 그 옆에 연탄 아궁이가 있었다. 보일러 시설이 된 연탄이 아니었으므로 연탄의 붉고 푸른 불꽃이 혀를 날름거리며 구들장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 불꽃이 나를 키웠다. 그 불꽃으로 밥과 국과 라면을 끓였고, 양말과 운동화를 말렸고, 양은찜통에다 밤새 물을 데워 아침에 머리를 감았다. 불을 꺼트리지 않으려고 자다가 벌떡 일어나 연탄을 갈았고, 연탄구멍을 정확하게 맞추려고 잠이 가득 찬 눈을 비볐고, 그리고 연탄가스를 맡지 않으려고 몇 초 동안은 숨을 참아야 했다.
하루는 자다가 오줌이 마려워 깬 적이 있다. 대문 옆에 붙은 재래식 변소까지 걸어간 기억은 생생한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변소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아차, 싶었다. 연탄가스를 마신 것이었다. 잠자리에 들기 바로 직전에 연탄을 간 게 불찰이었다. 나는 내 팔을 힘껏 꼬집었다. 아팠다. 방으로 돌아가 사촌형을 흔들어 깨웠다. 형, 괜찮아? 머리가 어지럽다며 형은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이대로 잠들면 안 된다고 형이 말했다. 연탄가스를 마시면 시원한 동치미 국물을 마시면 된다는 말이 떠올랐으나 궁핍한 자취생에게 동치미가 있을 리 없었다. 하수구에 코를 박고 숨을 쉬라는 것도 떠돌아다니는 응급조치법의 하나였는데 그렇게까지 해야 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은 아닌 듯했다. 졸음은 쏟아졌지만 두 시간 가까이 잠을 누르며 겨울밤을 하얗게 보냈다.
언덕 위에 있던 그 자취방을 나와 학교로 가려면 가파른 길을 내려가야 했다. 겨울이면 눈 녹은 물이 비탈길을 빙판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그런 아침에는 누군가 어김없이 비탈길에 연탄재를 잘게 부수어 뿌려 놓곤 했다. 그 고마운 분이 누구인지는 지금도 모르지만 이 세상에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는 분이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 <연탄 한 장> 전문
문학에 눈을 뜨면서 해마다 12월 언저리에는 이른바 신춘문예 열병을 앓곤 했는데, 당선 통지를 기다리며 연탄불에 라면을 끓이는 날이 많았다. 라면이 끓는 양은냄비를 숟가락으로 익숙하게 들어올리는 일은 이력이 붙었으나 기다리는 신문사의 당선 통보는 왜 그리 목을 길게 만들던지. 그런 겨울, 연탄도 떨어지고 친구네 집에 두어 장 빌리러 가기도 민망해서 차가운 자취방에서 이홉들이 소주를 병째 들이키고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들던 날이 있었다. 내 문학은 연탄의 뜨거운 기운을 받을 자격조차 없다고 자책하면서 말이다.
결혼을 하고 첫 아이를 가질 때까지도 연탄을 때는 열두 평짜리 아파트에 살았다. 그 아파트는 공단 노동자들의 자취방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었다. 그 집들은 하나같이 지붕이 낮았고, 어깨를 다닥다닥 붙이고 있었다. 밤늦게 책을 보거나 글을 쓰다가 마을을 내려다보면 깜깜했던 어느 집 창문에 거짓말같이 불이 들어왔다. 나는 그 백열 전구를 밝히는 손과 그의 고향과 하는 일과 월급과 노동조건을 생각했다. 그가 곤하게 잠이 들었다가 연탄을 갈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어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연탄불 갈아 보았는가
겨울 밤 세 시나 네 시 무렵에
일어나기는 죽어도 싫고, 그렇다고 안 일어날 수도 없을 때
때를 놓쳤다가는
라면 하나도 끓여 먹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는
벌떡 일어나 육십 촉 백열전구를 켜고
눈 비비며 드르륵, 부엌으로 난 미닫이문을 열어 보았는가
처마 밑으로 흰 눈이 계층상승욕구처럼 쌓이던 밤
나는 그 밤에 대해 지금부터 쓰려고 한다
연탄을 갈아본 사람이 존재의 밑바닥을 안다,
이렇게 썼다가는 지우고
연탄집게 한번 잡아 보지 않고 삶을 안다고 하지 마라,
이렇게 썼다가는 다시 지우고 볼펜을 놓고
세상을 내다본다, 세상은 폭설 속에서
숨을 헐떡이다가 금방 멈춰 선 증기기관차 같다
희망을 노래하는 일이 왜 이렇게 힘이 드는가를 생각하는 동안
내가 사는 아파트 아래 공단 마을
다닥다닥 붙은 어느 자취방 들창문에 문득 불이 켜진다
그러면 나는 누군가 자기 자신을 힘겹게도 끙, 일으켜 세워
연탄을 갈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리수출자유지역 귀금속공장에 나가는 그는
근로기준법 한 줄 읽지 않은 어린 노동자
밤새 철야작업 하고 왔거나
술 한 잔 하고는 좆도 씨발, 비틀거리며 와서
빨간 눈으로 연탄 불구멍을 맞추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다 타버린 연탄재 같은 몇 장의 삭은 꿈을
버리지 못하고, 부엌 구석에 차곡차곡 쌓아 두고
연탄냄새에게 자기 자신이 들키지 않으려고
그는 될수록 오래 숨을 참을 것이다
아아 그러나, 그것은 연탄을 갈아본 사람만이 아는
참을 수 없는 치욕과도 같은 것
불현듯 나는 서러워진다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눈발 때문이 아니라
시 몇 줄에 아둥바둥 매달려 지내온 날들이 무엇이었나 싶어서
나는 그 동안 세상 바깥에서 세상 속을 몰래 훔쳐보기만 했던 것이다
다시, 볼펜을 잡아야겠다
낮은 곳으로 자꾸 제 몸을 들이미는 눈발이
오늘밤 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불이 되었으면 좋겠다, 라고
나는 써야겠다, 이 세상의 한복판에서
지금 내가 쓰는 시가 밥이 되고 국물이 되도록
끝없이 쓰다 보면 겨울 밤 세 시나 네 시쯤
내 방의 꺼지지 않은 불빛을 보고 누군가 중얼거릴 것이다
살아야겠다고, 흰 종이 위에다 꼭꼭 눌러
이 세상을 사랑해야겠다고 쓰고 또 쓸 것이다
- <겨울밤에 시 쓰기> 전문
벌겋게 달아오른 연탄 밑불이 위에 새로 놓이는 연탄에게 불꽃을 넘겨주듯이 20세기의 연탄은 21세기에도 꺼지지 않고 있다. 아직도 어디에선가 연탄, 이라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아픈 사람이 있을 것이고, 겨울날 골목길 사이로 싸하게 퍼지는 차가운 연탄 냄새가 코끝으로 스며들면 생활이 더 쓸쓸하게 느껴지는 이가 있을 것이다.
너나없이 연탄을 때던 시절에는 연탄 창고 가득 연탄이 쟁여져 있으면 겨우내 마치 큰 부자가 된 듯 그렇게 든든할 수 없었다. 나는 누구에게 든든한 사람이 될 수 없나? 누구에게 뜨거운 사람이 될 수 없나? 나는 나에게 오늘도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너에게 묻는다> 전문
▣ 언제나, 누구나 특별한 느낌을 받게 되는 시들
“우체국 앞을 지나다가 우연히 옛날 친구가 생각나 즉석에서 편지를 써서 부치는 머리 희끗한 분들을 이따금 보게 됩니다. 젊은이들은 아무래도 휴대폰이나 이메일 같은 첨단 매체를 선호하기 마련이죠.” 젊은이들이 외면하는 우체국들은 요즘 본업인 우편업무에 못지않게 금융업무에도 열중하고 있다. 충정로우체국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쪽은 우편물을 접수하는 창구이고 왼쪽은 입출금과 공과금 납부, 보험 등의 업무를 보는 창구로 구분되어 있다. 오른쪽이 장소는 비좁은데 사람은 붐비는 반면, 왼쪽은 대체로 한산하여 쾌적한 모습이다. 그렇지만,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시인들이 노래한 낭만과 여유를 찾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것은 혹 안도현 시인이 노래한 가상의 ‘바닷가 우체국’에서나 찾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최재봉, 『간이역에서 사이버스페이스까지(한국문학의 공간 탐사)』(이룸, 2003)에서]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 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 <바닷가 우체국> 부분
세 번째 시집 『그대에게 가고 싶다』에서 갈등의 약화, 역사의식의 변질, 현실과의 거리감 같은 시의식은 얼마든지 발견된다. 즉 민중적 역사의식이 세계와 합일되면서 자아를 누르던 서사성이 과거지향 또는 연가풍의 구조로 현실을 이탈해 버린다. 이 시에 수록된 52편의 시 가운데 외연이긴 하지만 바로 사랑을 테마로 하고 있는 시가 10여 편이다. 이것은 이 시집의 내포가 사랑의 성분을 결코 단순하게 해석할 수 없는 몇 가지 근거를 지녔다 할지라도 앞의 두 시집과는 큰 차이를 이루는 점이다. 이것을 민중적 서정성이라 할까, 아니면 서정적 민중의식이라 할까.
한번은 만났고
그 언제 어느 길목에서 만날 듯한
내 사랑을
그대라고 부른다.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홀연히 떠나는 강물을
들녘에도 앉지 못하고 떠다니는 눈송이를
고향 등진 잡놈을 용서하는 밤 불빛을
찬물 먹으며 바라보는 새벽 거리를
그대라고 부른다.
지금은 반쪼가리 땅
나의 별 나의 조국을
그대라고 부른다.
이 세상을 이루는
보잘것 없어 소중한 모든 이름들을
입 맞추며 쓰러지고 싶은
나 자신까지를
그대라고 부른다.
- <그대> 전문
그대의 대상이 넷이다. 첫째는 이성이고, 둘째는 강물, 눈송이, 밤 불빛, 새벽거리이고, 셋째는 조국이고, 넷째는 나와 이 세상의 모든 것이다. 한 시집의 내포를 작자의 의도에 맞춰 해석하는 것이 문학연구가 아닌 것인 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시집 『그대에게 가고 싶다』의 테마는 위 시가 가리키는 네 가지 갈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듯하다. 이런 점은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 『모닥불』 두 시집에 나타나던 현실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이를테면 분단, 농민, 빈민층, 전교조 문제 등이 이 시집에서는 셋째, 넷째로 밀려나 있다. 특히 둘째의 테마는 대부분의 서정시가 대상으로 하는 오브제들을 연인이나 정다운 사람에게 이야기하듯 잔잔한 톤으로 말하고 있다. ‘그대가 한 자락 강물로 내 마음을 적시는 동안 끝없이 우는 밤으로 날을 지새우던 나는 들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밤마다 울지 않으려고 괴로워하는 별을 바라보았습니다’라고, 이렇게 시의 퍼스나는 먼 세계를 향해 가고 있다. 별을 향해 가듯이 현실을 떠나고 있다. 얼핏 20년대의 한 대가의 문체를 연상시키는 이 시인의 이런 변모가 민중적 서정을 바로 획득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높은 시의 자리란 것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선사가 현실에서 해낸 엄청난 행적을 상기할 때, 이 땅의 시인들―80년대의 민중시인들이 수행하다 중지한, 그 중의 한사람 안도현이 이렇게 서정세계에로 회귀하는 자세는 자신의 고통스런 체험을 통한 것이라기보다 시대상황에 맞물린 논리가 아니겠는가 하는 심증을 남긴다. 시가 시대와 함수관계를 이루고는 있으나, 그런 시가 체험의 함량미달 때문에 현실문제를 깊이 있게 담아내지 못한 점 때문이다.[오양호, 『산문정신의 탐색』(국학자료원, 1996)에서]
안도현의 시 <흔적>은 소나기가 한 차례 쏟아지고 난 뒤 햇볕이 내리쬐는 날씨 속의 사물들의 풍경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의 소재는 그야말로 조그맣고 하찮은 사물들이다. 그렇지만, 그 자잘한 사물들에서 길어 올린 시적 통찰은 매우 깊고 크다.
비 맞은 흔적을 지우려고
새 잎을 반 뼘쯤 내민 감나무가
빗물을 털고 일어서자
마늘밭에 줄지어 선 마늘순이 덩달아 몸을 떤다
비의 기억을 빨리 잊어버려야 한다는 듯
돌멩이는 돌멩이끼리 모여 이마를 내어 말리고
돌들 틈 사이 풀들도
가는 손을 뻗어 볕을 쬐려고 옹송거린다
그래도 태연한 것들은
일찍이 버려진 것들이다
마당가 나뒹구는 스테인레스 밥그릇,
다 삭은 고무신 한 짝,
이 빠진 옹기
오래 전부터 퍼질러 앉은 확독,
둥근 입이 몸인 것들이
온몸으로
고요히 빗물을 받쳐 안고 있다.
- <흔적> 일부
시인은 소나기가 지나가고 햇볕이 내리쬐는 날씨 속의 사물들 풍경을 대비해서 바라본다. 하나는 감나무, 마늘밭, 돌멩이들과 같은 자연의 사물들이고, 또 하나는 버려진 스테인레스 밥그릇, 다 삭은 고무신, 이 빠진 옹기, 확독과 같이 사람들이 쓰다 버린 사물들이다. 후자의 사물들은 공통적으로 둥근 형체를 지니고 있다. 시인은 두 종류의 사물들의 모습을 대비해서 바라본다.
그런데 시인은 단순히 사물들의 외양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흔적’을 바라보면서 어떤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이 시는 단순히 두 종류의 사물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종류의 사물들의 ‘흔적’에서 시적 성찰을 시도하고 있는 작품이다. 감나무, 마늘밭, 돌멩이들과 같은 자연의 사물들은 소나기가 지나간 뒤 햇볕이 내리쬐면 물기가 마르는 반면, 사람들이 쓰다 버린 둥근 형체의 사물들은 빗물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두 종류의 사물들의 대비적인 모습을 보면서, 시인은 자연 속의 사물들은 ‘흔적’을 ‘지우고’, ‘털고’, ‘잊어버리고’, 햇볕을 향해 손을 뻗는 반면에, 버려진 둥근 형체의 사물들은 ‘태연하게’ 그 ‘흔적’을 그대로 안고 있다고 생각한다.[고형진, 『또 하나의 실재』(새미, 2003)에서]
안도현의 시에서 느껴지는 친근감은 소박한 생활과 그 생활 속에서 벌어지는 구체적인 상황을 따뜻한 정서로 그려내는 데 있다. 그의 시에는 경험적 세계가 그대로 시의 상상력을 형성하는 주요 인자가 되고 있는데, 농민의 아들, 군인, 교사, 남편, 해직 교사 등으로 변화해 가는 삶의 과정을 안도현만큼 뚜렷이 자신의 시에 드러내는 시인도 드물 것이다. 관념이나 이념보다는 이처럼 생활과 체험이 바탕이 될 때 그의 시는 가장 빛을 발한다. 그의 많은 시편들 가운데 <유민(流民)>, <빈논>, <1960년대>, <여름방학>, <이리중학교>, <폭풍우를 기다리며>와 같이 생활의 구체적인 상황을 재현해내고 있는 작품들은 잔잔한 감동과 울림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비교적 작품의 긴장과 미감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에는 아버지의 농업과 목조건물 삐걱이는 풍산초등학교가 있으며, 청무를 씹으며 소주잔을 주고받던 친구들과 가난의 흔적들을 말해주는 ‘밥’과 누추한 ‘집’이 있다. 그리고 예천, 홍천, 군산 등지로 거처를 옮겨 살면서 갖게 되는 고향에 대한 향수가 슬픔으로 배어 있다. 안도현은 이와 같은 생활 체험을 자연스럽고도 친근한 은유적 상상력 속에 용해시킴으로써 그의 시에 미적 질감을 부여한다.[엄경희, 『빙벽의 언어』(새움, 2002)-‘사랑과 고통의 편력’에서]
안도현 시인은 해외에서도 그의 문학성을 크게 인정받았는데, 해외에서 번역출간된 저서가《炸醬麵》(대만 晨星出版, 2002),《炸醬麵》(중국 하얼빈출판, 2003),《연어》(대만 晨星出版, 2002) 등 3종이나 되는 점에 주목된다. 뿐만 아니라, 2003년에는 일본 청수사에서 주관하는 21세기 세계시인선에 선정되어 시선집인《氷蝉》이 번역 출간되기도 했다. 2002년에 서일본신문에 에세이를 50회나 연재한 점도 놀랄만한 일이다.
해외에서도 이렇게 그의 문학성이 널리 그리고 깊이 인정받는 점을 바라보건대, 오늘날 해외에서의 문학관련 ‘한류’(韓流)도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러한 한류를 안도현 시인이 알게 모르게 형성해 왔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또한 이는 한민족 문인의 한 사람인 필자로서도 분명 갖게 되는 가슴 뿌듯한 자부심이 아닐 수 없다.
* 월간 시사문단 2005.6월호 헤드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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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설문단의 신데렐라, 김별아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