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서사시를 쓰는가 - 안도섭 시인에게 묻는다
-월간 <문학21> 2005.9월호 권두대담-
(대담: 안도섭 시인, 최경희 시인, 안재동 시인, 전수향 시인 / 정리: 안재동 시인)
■ 순탄치 않았던 문학의 길을 평생 걷다
(안재동)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문예지 운영에 여간 노고가 크시지 않으신 줄 알지만 자주 찾아뵙고 뭐 하나라도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나마 이젠 날씨라도 제법 선선해졌으니 마음이 다소 편합니다.
(안도섭) 네 반갑습니다. 그동안 편히들 지내셨나요? 『문학21』은 월간지이므로 매달 책을 내야하고, 솔직히 원고를 모으고 편집을 하는 과정에선 물론 책이 나올 시점이면 언제나 머리에 피가 마르는 느낌이 들곤 합니다.
(최경희) 저는 『문학21』을 몇 년 동안 꾸준히 구독해 왔고 제가 알기론 지난 2005년 2월호가 문학21의 통권 120호를 기록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첫 호가 나온 지 만 10년째가 되는 시점이었지요. 그 10년 동안 결호가 혹여 있지는 않았는지요.
(안도섭) 네. 우리 『문학21』은 창간호가 발간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결호가 없었습니다.
전수향 오늘날 국내에 계간, 격월간, 월간 등 대략 200여종이나 되는 많은 문예지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문예지들이 수시로 생겨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35년 전통의 순수문학 계간지 『동서문학』이 지난해 겨울호(225호)를 끝으로 종간한 것이 그 대표적 예이기도 하구요. 『문학21』의 경우도 그동안 위기 상황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문예지 운영에 있어 어려웠던 때는 언제였나요?
(안도섭) 그렇지요. 문예지 운영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정말 만만한 일이 아니지요. 글쎄요. 『문학21』이 가장 어려움을 겪었을 때는 아마 과거 나라 전체의 경제위기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IMF 전후 시기가 아니었던가 합니다만….
(안재동) 선생님의 유년기와 소년기 그리고 청년기 등의 성장과정이 궁금합니다. 성장과정에서 집안에 경제사정이라든가 특별한 우여곡절은 없었는지요?
(안도섭) 저는 전라도 보성 출생입니다. 유년기와 소년기까지는 농촌에서 비교적 평탄하게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청년기 때는 8·15와 6·25 등을 겪으면서 당시의 여느 농촌 가구나 마찬가지로 우리 집안도 살림이 조금 어려워졌지요. 중학교 때까지는 고향에서 성장했어요. 중학교 때 여순병란이 일어나고 우리 고장까지 밀어닥친 봉기군과 토벌대의 전투 장면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어요. 나의 서사시 <섬진강 뱃노래>의 모티브는 아마 그때 싹이 트지 않았나 싶어요. 고등학교는 조선대 부고를 다녔습니다. 그 후 조선대학교 국문과에 진학을 했지요.
(최경희) 선생님은 1958년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서 <불모지>란 시로 평화신문 신춘문예에서 <해당화>로 각각 당선되셨습니다. <불모지>와 <해당화>의 창작의도나 작품의 배경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안도섭) 네, <불모지>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산천을 떠올리면서, 그 참혹성에 도전하는 역사의식이, <해당화>는 서정성이 짙게 깔린 작품이라 할까요. 조선일보에는 56년에 박봉우의 <휴전선>이 57년에 윤삼하의 <응시자>가, 59년에 신동엽의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등과 같이 드센 역사의식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최경희) 선생님의 초기 작품인 <지도 속의 눈>과 <풀잎서장> 등을 민족시로 평가하는 평론가가 있었습니다. 왜 그런지, 그 작품 속에 스며 있는 창작의도랄까 작품 내용을 간단히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안도섭) 당시 박봉우 시인의 <휴전선>이 휴전선이 쇠울로 고착되어버린 현실에 대한 저항성을 담은 시로 유명했지만, <지도 속의 눈>은 황무지와 폐허 속에서도 소녀에 대한 사랑을 ‘신화를 엮어내듯 꽃 다이 살자’라고 노래했지요. 작품의 내면적 의미는 ‘민족 화합’에 있습니다. <풀잎서장>은 민중적 상징시이며 시를 통한 평화의 미학이고자 했습니다.
(안재동) 4·19 당시 선생님의 개인적 주변 환경과 문학 활동은 어떠했는지, 그로 인한 문학관련 철학의 변화 같은 것이라도 있었는지요?
(안도섭) 4·19 당시는 내가 근무하던 『현대문학』을 떠나 광주로 내려가 있을 때였습니다. 말하자면 서울 문단과는 격리되어 있을 때였지요. 그 때 <누가 막을 수 있었으랴>라는 장시를 「전남일보」에 발표했는데, 그것이 나도 모르게 1960년에 신동엽이 펴낸 《학생혁명시집》에 실렸지요.
(전수향) 선생님은 탁월한 서정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면서 선생님을 민족시인으로 평가하는 문인들도 많습니다. 과거에 문학 활동 관련으로 수감되었던 사실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때가 언제였습니까?
(안도섭) 5·16이 일어났을 때였지요. 그 때 한국의 정치 상황은 살얼음판이나 마찬가지였어요. 당시에 「전남매일신문」이 창간 과정에 있었고 내가 문화부장을 맡게 되었지요. 그리고 원로화가 오지호 선생이 ‘민주자주통일연맹’이란 단체의 전라남도 조직국장을 맡았는데, 나를 문화부장을 맡게 했지요. 그 후 광주에서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전국의 혁신계 지도자대회가 열리고 그 자리에서 전남여고의 어느 학생이 내 시 <누가 막을 수 있었으랴>를 낭송하였답니다. 그 때문에 체포령이 내리고 한달여 동안을 피해 다니다 결국 체포되어 광주형무소와 서대문형무소에서 각각 3개월씩, 6개월 동안 수감되었지요. 당시 미국 「타임」지의 표지에 박정희의 사진이 게재되어 미국 정보통이 한국의 정치상황에 주목하게 되자, 5·16 세력들이 아차 싶어 소급법이라는 것을 만들어 장면 정권 때 합법적으로 행했던 혁신계의 모든 인사들을 체포 수감했던 거지요. 「민족일보」 사장 등은 사형에, 각급 국장급 이상은 기소, 그 밖은 불기소 처분되어 나왔는데 이른바 일종의 희생양이 된 셈이었죠.
(전수향) 선생님께서는 지금까지 시집 14권과 에세이집 4권, 소설집 7권을 내는 등 많은 창작을 해 오셨습니다. 그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과 작품집은 어떤 것인지요?
(안도섭) 네, 뭐 딱 꼬집어 얘기하기가 좀 그렇긴 하네요. 굳이 말해야 한다면 작품으로는 시 <지리산>과 <서정가> 그리고 초기 작품 <풀잎서장>, <지도 속의 눈> 등의 시가 아닐까 합니다. 원로시인 김규동 선생은 <지리산>을 ‘잘 육화된 시’로 성공했다고 평한 적이 있고, 장충렬 시인(낭송가)은 <지리산>과 <국화 옆에서>를 낭송하기 좋은 시로 꼽은 적이 있습니다. 또한 <서정가>는 평론가 이시환 시인이 40편의 명시를 해설과 함께 엮어 낸 《명시감상》에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작품집으로는 《지리산은 살아 있다》와 《돌에도 꽃이 핀다 했으니》라고 할까….
■ 서사시는 소설보다 경제적이다
(안재동) 선생님의 서사시 <새야 녹두새야>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만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좀 듣고 싶습니다.
(안도섭) <새야 녹두새야>의 이야기는 1988~89년에 창작 발간한 3권의 장편소설 <녹두>(한마음사)의 바탕이 되기도 했지요. 1979년에 「농민문화農民文化」지에 연재하기도 했고, 1980년에 《황토현의 횃불》이란 단행본으로 간행했는데, 신군부의 계엄령 상황에서 서울시청의 검열에 걸려 5,000부가 몰수당하는 바람에 사실상 햇볕을 보지 못했구요. 또 그와 관련으로 계엄군에 의해 체포될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2001년에 이르러서야 『문학21』지에 9회에 걸쳐 다시 연재하고, 조탁彫琢과 증보[‘뒷이야기 1~2’ 추가]를 더 거친 뒤 2002년 5월 15일에 단행본으로 초판 후 20여 년 만에 빛을 보게 된 것이지요.
(최경희) 선생님께서는 몇 년에 걸쳐 『문학21』에 줄곧 서시시를 연재하고 있는데 일찍이 우리 문학사상 보지 못한 그러한 대하서사시가 될 것 같은데요?
(안도섭) 네, 2004년 11월호에 연재하기 시작한 이래 2005년 5월호에 제1부가 종료된 <섬진강 뱃노래>이 이어 2005년 6월호에 시작하여 2005년 12월호에 마칠 예정인 제2부 <아, 삼팔선>을 연재중이구요. 제3부 <무기여 안녕>은 2006년 1월호를 시작으로 2006년 7월호에 종료할 예정으로 있습니다.
(최경희) 그러면 이전의 <새야 녹두새야>와 이번에 3부작으로 나가고 있는 대하서사시의 소재 또는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좀 들려주시고 넘어 갈까요?
(안도섭) <새야 녹두새야>는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에 있었던 동학농민전쟁을 다룬 창작 서사시입니다. <섬진강 뱃노래>는 1948년 여순병란 때 여수 14연대가 봉기한 데서 시작하여 그네들이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으로 활동하는 과정을 그린 내용입니다. <아, 삼팔선>은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로 인한 민족비극이 시작된 이야기를 다룬 것이구요, <무기여 안녕>은 38선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휴전선의 의미와 미국과 중국 등 강대국들의 힘겨루기에 대리전 역할을 감당해야 했던 우리 민족의 비극과 그로 말미암은 남한 내 빨치산의 운명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최경희) 그러면, 그러한 작품을 쓰시는 데 어떤 의미를 찾고자 하시는지요?
(안도섭) 반세기전의 대사건인 여순반란사건과 빨치산 활동, 한국전쟁 등 민족의 비극이 50여 년 전 역사적 사건이기 하나 아직도 미해결된 일이라고 보며, 어제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도 이어질 우리 민족의 오천년 역사상 가장 비극적이고 심대한 문제라 할 것입니다. 이에 전쟁의 잔학하고 처절한 상황을 고발하고 궁극적으로 민족의 화해와 겨레의 통일을 위한 7천만 민족의 염원을 담고자 하는 것입니다.
(전수향) 그처럼 방대한 작품을 소설로 쓰지 않고 굳이 서사시로 쓰시는 이유가 특별히 있는지요?
(안도섭)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이나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이 같은 맥락의 소재와 주제를 담고 있다 하겠습니다. 나의 경우, 이것을 소설로 쓴다면 방대한 양이 되리라 봅니다. 그러한 내용을 서사시로 쓴다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겠지요. 중요한 것은 소설이 갖는 느슨한 흐름보다는 서사시의 속도감과 압축성을 가지려 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소설보다는 서사시가 매우 경제적이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소설보다는 서사시로서 승부를 겨루고자 하는 것이 내가 추구하는 것입니다.
(전수향) 선생님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사건이 그때로부터 50여 년이나 흐른 역사적 사건인데도 아주 디테일한 묘사나 에피소드들이 수많이 나오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특별한 노력이나 방법이 있습니까?
(안도섭) 어느 시인이 같은 질문을 제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괴테의 <파우스트> 는 그의 라이프 워크(Life-Work), 즉 평생작업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나도 그와 같은 평생작업으로 30여 년을 준비해 왔습니다. 그동안 한국은 물론 미국, 일본, 북한, 중국, 러시아 등 집필에 필요한 책과 자료를 모았고 30여 년 이상 신문스크랩 등을 하면서 작품구상을 하며 사건과 연관된 인물들과 만나며 대화를 나누기도 했지요. 또 그와 관련한 서사시를 쓸 수 있는 시기도 냉전시대가 지나도록 기다려야 했지요.
(최경희) 작품을 쓰시는데 있어 그 밖의 어려움이나 제기되는 문제점이 혹여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안도섭) 한국전쟁의 발발 원인이 세계적으로 아직 문제 제기 상태에 놓여 있다는 점을 들 수 있겠습니다.
우선 ‘북침설’입니다. 전쟁이 나기 전 신성모 국방이 “아침은 서울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고 했던 말이나 언제든 기회 있으면 북진한다는 이승만의 북진정책이 그렇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으론, ‘남침설’입니다. 이른바 서울해방설로서 당시 북한의 6사단 정치보위부 최태환 대좌가 개성에서 작전명령을 받기 전 위도 37도선의 작전지도를 지참했다는 좌담회에서의 증언이 있습니다. 서울을 점령, 서울에 있는 국회만 장악하면 통일할 수 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유도설’도 있는데요. 미국이 인민군 주력부대를 낙동강까지 끌어들여 일시에 궤멸시키고자 했었다는 전략 바로 그것이라고나 할까요. 당시 미국 애치슨 국무장관이 한국에서 전쟁이 나더라도 한국과 대만은 미국의 지원권에서 제외시킨다고 발언하여 김일성으로 하여금 오판을 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겠구요. 김일성이 박헌영을 대동하고 스탈린을 찾았을 때 만일 미군이 참전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묻자 애치슨 성명을 들먹이며 한달이면 남한을 해방시킬 수 있다고 했지요. 또한 한국 사람으로서 당시 미국 CIA 한국담당 소장을 지낸 하리마오(본명 박상억)는 ≪38선도 6·25 한국전쟁도 미국의 작품이었다!≫라는 자신의 책에서 한국전쟁이 미국의 작품이었다고 말한 적도 있지요. 즉, 당시 광범하고도 탁월한 정보력을 가졌던 미국 CIA가 북의 남침의도를 몰랐다는 것은 어린애 장난 같은 소리라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전쟁 가능성 등 모든 상황을 미국이 이미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한국을 무방비 상태로 내버려 두고 있었다 할까요. 그런 일련의 사실들이 ‘유도설’을 뒷받침하는 것이지요.
또한 미국 ‘수정학파’의 두 거두,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나 I. F. 스톤의 ≪秘史 한국전쟁≫ 등에서는 전쟁의 시기나 원인을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의 발포 시점에 두지 않고, 1945년 8월 15일 38선의 푯말이 박힐 때 이미 전쟁의 싹은 텄다고 보고 있는 것이지요.
(안재동)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대하서사시 <금강>의 저자이며 저항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신동엽 시인과 특별한 인연도 있었던 것으로 들은 바 있습니다. 그 분과 함께 문학 활동을 한 일이라든가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면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안도섭) 내가 아는 많은 시인들 가운데서 신동엽 시인과 특히 친하게 지냈다고나 할까요. 한 때 가장 친한 사이이기도 했습니다. 내가 「현대문학」에 입사할 무렵에는 신동엽 시인이 돈암동 시장에서 고서점을 경영하다 실패한 뒤 그의 장모가 운영하는 포목가게의 다락방에서 지내고 있을 때가 생각나는군요. 그 때 그는 갈 데가 없어서 퇴근 무렵이면 내가 세든 집 대문간에서 나를 기다리곤 하였지요.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로 널리 알려진 박경리 소설가도 그 당시 그 곳 주위에 거주했었고, 같은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자이며 시 <휴전선>으로 유명했던 박봉우 시인도 그 근처에 살았는데, 그들과 함께 어울려 다닐 때가 많았죠. 내가 1958년에, 신동엽 시인이 그 이듬해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나온 점도 그와 깊은 인연을 맺을 수 있었던 계기가 될 수 있었지요. 아무튼 신동엽 시인은 문학적으로 나와 뜻이 많이 통했던 사람입니다.
(안재동) <금강>과 <새야 녹두새야>가 작품 의도나 문학성 그리고 문학사적 측면에서 대비되는 경우가 많은데 큰 차이가 존재한다면 어떤 것일까요?
(안도섭) 네, 그와 관련한 내용은 시간상 자세한 설명 드리기가 좀 그렇고 신규호 평론가가 썼던 문학평론 ‘農民의 恨, 겨레의 꿈 노래한 大河敍事詩—安道燮作 <새야 녹두새야>의 民族史的ㆍ藝術的 價値’에 자세히 나타나 있으므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다만, 신동엽의 <금강>은 그 시인이 39세로 타계한 탓으로 퇴고할 기회가 많지 않았을 것이며, <새야 녹두새야>는 그럴 기회가 더 있었다는 점이 다르다고나 할까요.
http://www.lite21.com/seosa-poem.htm (클릭)
* 월간 문학21 2005.9월호 특집대담 진행 및 정리, 발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