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거장을 놓치다 * / 안재동

전철의 차창 밖이
갑자기 칠흑같이 어두워지고
굵은 빗줄기가 요란하게 차창을 때릴 때
내 눈은 내가 펼쳐든 책 속의
어느 앳된 소녀가 가슴에 꼭 껴안은
눈송이처럼 하얀 라일락 꽃다발을
뚫어져라 바라보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내 귀엔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평소 소음같이 웅성거리던 객실

얼마나 지났을까
책장을 이리저리 넘기다가
다음 정차역을 알리는
승무원의 카랑카랑한 안내방송이
평소와 달리 영 새삼스럽다고
느껴졌을 땐 기차는
내가 꼭 내렸어야 할 정거장을
이미 지나, 다른 몇몇 정거장을 더
지나치고 있었다

그때 잠시
다시 내 눈동자를 가득 채운 것은
외진 길가에서 비를 흠뻑 맞으며
세월처럼 덧없이 차창을 스쳐가던,
어느 늙은 나무 한 그루였다
키와 몸집은 크지만 도끼에라도 패인 듯
한쪽으로 크게 기우뚱하게 서서
나를 놓치고 싶지 않으려는 듯
아니 어쩌면 내가 그를

* 월간 <스토리문학> 2007.2월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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